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수대전 (문단 편집) == 배경 == [[파일:전진-동진.png|width=100%]] '''전진(분홍색)의 최대 영역(376)'''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황제#s-2|황제]]였던 [[부견]](337~385)은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킨 [[수문제]] 양견 이전 천하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으로, 자신은 티베트계 저족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차별을 두지 않았음은 물론 명재상 [[왕맹]]을 기용해 성공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화북과 서역을 모조리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북조를 모두 정리했다. 게다가 동진이 점령했던 [[회하]], 장강 일대, 사천 지방[* 동진이 성한을 멸망시킨 지 수십 년 만에 북조에 빼앗겼다.]도 이미 점령한 상황이어서 이제 남아있는 거라곤 강남의 동진 하나뿐이었다. 부견은 중원 재통일을 위해 남아도는 국력을 총동원해서 대군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부하도, 아들도, 동생도, 아내도, 어머니도, 주요 신하들도, 심지어 부견이 존경하던 스님 도안도 다 반대했다. 바로 그 왕맹도 죽으면서 >"우리 나라에 있는 한족은 아직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동진은 현재 위아래가 일치단결되어 있으니 괜히 집적대지 말고 [[모용선비]]족 출신으로 계속 폐하께 아첨이나 하는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부터 신경쓰시고 기회되면 제거해버리십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려 도안이 동진과의 전쟁을 반대하자 부견이 한 말이 있다. >"이 원정은 영토 확장과 인구 탈취의 목적이 아니다. (중략) [[영가의 난]] 이래, 강남에 떠돌고 있는 사대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하여 인재를 등용하기 위함이며, 무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다." 이 대화에서 부견이 이상적인 통치를 추구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존재 기간 내내 황제가 귀족들 눈치나 보며 한 순간도 막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동진의 상황을 생각하면[* 서진과 동진 전부 합쳐도 제대로 된 황제가 명제, 효무제 잘 쳐줘도 무제, 회제, 성제. 이게 끝이다. 성제와 목제는 능력이 있었으나 요절(게다가 목제는 부검 결과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했고, 강제, 애제는 무능했으며, 폐제와 공제는 능력 자체는 있었으나.....] 많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전진에 남아 있는 한족들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걸 더 싫어했다는 의미로 생각하자. 사실 좀 냉정히 생각해보면 황제들만 정상이 아니었던 편인 거지 부견의 통일전에 화북에 공세적인 북벌 정책을 펴서 화북왕조들을 당황하게 한 [[환온]]의 사례도 있고, 후대에 북벌로 하북을 빼고는 거의 평정한 [[무제(유송)|유유]]의 사례도 보면 툭하면 분열되고 정치적 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오호]] 왕조들에 비해 동진의 역량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급격한 통일 작업 덕분에 전진 내부에 있는 이민족들이 완전히 동화된 상태도 아니어서 수틀리면 언제든 다시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더하자면 동진이 막장스럽게 굴러가기는 했을지언정 한족 왕조의 정통성 우위라는 건 당시 생각보다 꽤나 컸다. 당장 저 위에 나오는 [[강족]]의 영수였던 [[요장]]의 아버지 [[요익중]]이 자녀들에게 자주 한 말이 >"자고 이래로 융적이 중원의 주인이 된 적이 없으니 너네는 진에 귀부하고 딴 맘 먹지 말아라." 였다. 뭐 당장 부견의 할아버지 [[부홍]]도 [[후조]]랑 틀어지고 나서 바로 동진으로 귀부해 버린 일도 있었으니.... 왕맹이 동진을 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나 전진의 조정, 그리고 부견 휘하 측근들이 반대한 것도 동진의 정통성에 대한 인식들의 연장선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부견은 왕맹이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은 왕맹의 유언을 잘 지켰다. 하지만 부견은 결국 최악의 패배를 낳고 말 비수대전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는 부견이라는 인물 자체가 순수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화북 지역의 통일을 이룬 다음 남쪽까지 아우르는 걸 꿈꾼 것은 스스로를 선대의 [[시황제|진시황]]이나 [[고제(전한)|한고제]]처럼 '통일중화제국의 황제'라는 연장선상에 놓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저족]]의 리더가 아니라 한족과 이민족을 아우르는 중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기에 한족과 이민족 가릴 것 없이 인재를 기용하고, 한족의 통치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내부 통일체제 구축이라는 선결과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진을 강행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