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수대전 (문단 편집) == 전개 == 부견이 왕맹 사후 7년째 되던 해, 갑자기 전쟁을 하려 들자 비서감 주융이 찬성했다. 상서좌복야 [[권익]], 태자좌위솔 석월, 양평공 부융, 황태자 부굉, 승려 도안, 장부인, 중산공 부선 등 주위에서 죄다 들고 일어나 반대했는데도 부견은 뭐에 씌였는지 주변에 떼를 쓰더니 위에 언급한 관군장군 겸 하남윤 [[모용수]]가 "그럼 하죠."라고 맞장구 좀 쳐주자마자 '''맹장 장자가 이끄는 선봉 250,000명에 자신이 이끄는 군대까지 모두 870,000명, 여기에 기타 병력까지 합쳐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구성해 동진 침략을 감행했다.[* 더 놀라운 것은 동시에 서역으로도 100,000명의 원정군을 보냈다!] 물론 그 이전과 이후에도 100만 대군이라는 묘사 자체는 많이 등장하지만 [[호왈백만|일반적으로는 과장이 많이 섞여 들어갔거나]] 단순히 많은 수의 군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100만 대군이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비수대전에 동원된 전진의 군사는 과장이 아닌 병력 편제 자체가 100만이라는 숫자를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런 장부상 병력들은 정확하진 않다. 의외로 군대 규모가 큰 경우, 장부상 병력을 다 채우지 못한 사례가 많다. 몽골 제국도 리즈 시절 때 장부상으로는 대략 160만 명의 대군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그보다 적었고, 아는 게 좀 있는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후한 말기 [[적벽대전]]때 오나라에서도 [[조조]]가 80만 명의 대병력을 보낼 것이라는 편지를 받고 난 후, [[손권]]이 80만 병력을 어찌 막냐는 발언을 하자 [[주유(삼국지)|주유]]가 "그거 뻥튀기고 18만+@임."이라며 50,000명의 병력을 준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당시에도 뻥튀기 논란이 있었던 것인데, 어쨌거나 이때 조조가 언급한 80만이라는 걸 사실이라고 본다고 해도 100만보다 적다. 거기다 하나 더, 적벽대전 당시 동오의 병력도 조조에게 압살당할 차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인류사에서 비수대전의 전진군과 [[양제(수)|수양제]]의 [[고구려-수 전쟁|고구려 원정]] 당시 수나라군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당시에 대해 《자치통감》은 병사만 113만 명, 수송대는 그 2배라고 기록하고 있다.] 빼면 ~~이렇게 보니 둘 다 끝이 안 좋았다~~ 그로부터 '''1,000년이 넘어''' [[제1차 세계 대전]] 때가 되어서야 100만대군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실로 놀라운 수치이다.[* 다만 수나라 이후 당나라는 효율적으로 군사를 편제하고 통솔하기 위해 가용 규모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즉 무식하게 머리수로 닥돌하는 이전 방식과 다르게 오히려 병사의 수를 줄이고 정예병 양성에 노력을 기울인 방식 덕분에 당나라는 전진과 수나라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보유하고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후대의 통일왕조인 원, 명, 청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중원의 송나라 역시 전시에 가용할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이 100만 명이 넘었고,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복무중인 상비군만 50만 명이 넘었으나 송나라 조정의 성향 때문에 수비 치중 및 공격시에는 앞서 당나라처럼 소규모 정예부대를 차출하여 보냈다.][* 다만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100만 대군이라는 엄청난 숫자 자체가 오히려 전진의 패배 원인 중 일부라고 볼 여지도 있다. 비수대전의 패배 원인을 간단히 요약하면 '모랄빵 전염으로 인한 전군 붕괴'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편제상으로 100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했다는 것은 곧 전쟁 경험이 없는 백성들을 대규모로 징병했다는 뜻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투 경험이 없는 징집병들은 쉽게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며 모랄빵에 대단히 취약하다. 차라리 20~30만이라도 비교적 정예병으로 편성되었다면 동진에 대한 전력 우위는 유지하면서도 일시적인 혼란이 곧바로 전군 붕괴로 이어지는 참사는 피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견이 자기 생전에 중국 통일을 한 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통일 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남은 국가는 동진뿐인지라 조금만 더 하면 목표 달성이기는 했다. 물론 자기 발 밑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서 보듯이 현대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원래 사람 심리가 한 번 좋은 것만 보기 시작하면 적신호가 얼마든지 들어와도 다 무시하거나 반박하게 되어 있으니] 아마 자기가 '''[[대인배|덕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감복]]'''했으므로 끝이라 보고, 난세에는 조금만 틈을 보이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무시한 모양이다.[* 다만 비수대전 직전 부견의 통치력은 안정적인 상태로 국내에 특별히 활동적인 저항세력이 없었고, 대규모 병력 동원도 무리없이 가능했음을 생각해 볼 때 '''만약 동진 원정에 성공했다면''' 국내의 불안정 문제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쉽게 수습되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대규모 대외원정의 성공은 황제(부견)의 권위와 위상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즉 동진 원정에서 부견의 실수는 '유해무득의 멍청한 짓을 했다'기 보다는 '이기면 크게 따지만 졌을 때 안정판이 없는 도박판에서 성급히 올인을 외쳤다'가 져서 싹 날린 것에 더 가깝다. 뭐 올인을 외치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본인이야 자기가 절대 지지 않을 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 부견이 전사한 후에도 일족이 계속 부견의 의지를 받들어 저항했으며, 나중에 배반하는 모용수나 요장 같은 이들도 양심에 찔렸는지 패전 후에도 즉시 부견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다. 왕맹의 유언을 7년 동안 잘 지켜놓고 갑자기 이를 어겨가며 침공을 강행한 것도, 7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천하통일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을 결정하고 나서 부견 본인은 수양(수춘)쪽으로 진격했고, 모용수는 한수를 타고 형주쪽을, 요장은 장강을 타고 형주를 공격했다. 이것은 동진의 수도 건강이 있는 강동과 동진의 중심지이던 형주 일대 중 하나라도 뚫리면 그대로 동진을 멸망시킬 수 있는 포진이었다. 당장 비수대전이 있기 백년전 [[오멸망전|오멸망]] 당시에도 이렇게 오나라가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망했고 2백년 후 [[진(남조)|남진]]이 이렇게 망하였으니 동진이 당대 최고의 위기 상황은 맞았던 것이다. 부견이 직접 공격한 수양(수춘)이 함락되고, 평로장군 서원희 등이 사로잡혔다. 수양성을 구원하러 온 동진군의 호빈은 회수 서쪽으로 물러나 협석을 지켰지만 이내 포위당해 전진군은 승승장구했다. 한편 북쪽에서 부견이 질량 낙하급 인해전술을 시전하니 동진에서도 막긴 해야겠는데, 동진은 이미 문벌귀족들간 개싸움으로 국력이 막장으로 치달아있었다. 그래도 일단 형주쪽을 공격하던 모용수를 막기 위해서 병력을 동원하고 수도인 건업이 있었던 강동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을 긁어모아보니 80,000명 가량이었다. 절대 우세인 가운데 전진은 대국의 아량을 보인답시고 항복한 한족 출신에 [[양양(중국 도시)|양양]]태수였던 [[주서(동진)|주서]]를 동진군에 보내 항복을 권고했는데, 항복은 했을지언정 마음은 동진에 가있었던 그는 바로 전진군의 전략을 몽땅 누설해버렸고, 선봉을 꺾어서 전진군의 사기를 꺾어버리라고 조언해주었다. 동진군은 그걸 기반으로 필승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실로 왕맹이 우려한 그대로였다. 게다가 80,000명은 말이 80,000명이지 수도권 방위를 위해서 동원한거라 상당히 정예병이었다. 일례로 광릉상 [[유뢰지]]가 이끌던 5,000명의 동진 북부군이 낙간에서, 전진군 장수 양성[* 수양쪽에 있었던 부견과는 별개로 강동을 공격하고 있었다.]과 맞붙었는데 양성이 크게 패배해서 양성을 포함한 15,000명이 죽고 전진의 익양태수 왕영이 사로잡혔다. 그걸 들은 부견과 부융도 >"동진의 군사는 약하다더니 누가 그런 말을 했나?" 라고 두려워할 정도였다.('''낙간 전투''') 그럼에도 부견은 [[천하통일]]이라는 욕심도 있었고, 이미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던 걸 뿌리치고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100만이라는 군사를 끌고 나왔던 터라 정치적인 이유로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결국 부견은 여전히 80,000명에 비하면 훨씬 많던 전진군의 수와 강남 왕조에 비하면 언제나 정예였던 군대를 믿고 결전을 벌여서 이기겠다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