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수대전 (문단 편집) == 영향 == '''전진은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이 한 방으로 멸망했다.''' 닥닥 긁어모아 보낸 병력을 일시에 깡그리 말아먹었으니[* 물론 100만 대군이 모조리 몰살당한 것은 아니고, 대다수는 살아서 전진 땅으로 도망쳤지만, 어차피 군사력이란 건 징집하고 편성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힘의 공백이 생긴 건 당연했고, 복속되었던 기존의 이민족 세력들이 대거 들고 일어나 기껏 통일되었던 전진의 광활한 영토를 갈갈이 찢어놓기 시작했다. 차라리 동진을 공격할 때 소수 병력만 보내 패배했다면 반란이 일어나도 막을 힘이 있었겠지만, 이때의 전진은 그럴 힘이 전혀 없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Map_of_Sixteen_Kingdoms_6.png]] '''비수대전 이후 중국의 형세'''[* 파란색은 선비 걸복부의 '''서진''', 분홍색은 저족 여씨의 '''[[후량(오호십육국시대)|후량]]''', 후량 남쪽의 무색인 곳은 선비 [[모용부]]의 '''[[토욕혼]]''', 녹색은 강족 요씨의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 후진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서연''', 서연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후연]], 후연 북쪽은 선비 [[탁발부]]의 [[북위]], 북위 북쪽은 튀르크계 '''[[철륵|고차(퇼레스)]]''', 남쪽의 노란색은 한족 사마씨의 [[동진]]이다.] 앞서 부견에게 전쟁하자고 홀로 부추겼던 선비 [[모용부]]의 [[모용수]]는 [[후연]](後燕)을 건국했다. 부견은 자신이 멋지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거기에 왕맹이 조심하라고 그리도 충고하던 신하인 [[강족]]의 수령 요장은 독립해서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後秦)을 세웠고, 역시 신하이던 선비 모용부의 모용홍도 덩달아 독립하여 [[서연#s-1|서연]]을 세워서 힘빠진 전진을 틈만 나면 쳐들어왔다. 또 일시적으로 전진에게 복속되었다가 군사를 준비하던 선비 [[걸복부]]에서는 전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여러 부족을 협박해서 병합해 100,000여 명에 이르는 무리를 이루어 농서 일대를 장악하고 [[서진(오호십육국시대)|서진]]을 건국했다. 게다가 남쪽에선 동진이 비수대전의 대승을 틈타 사천성을 쳐들어감과 동시에 화남 일대에선 황하까지 도달해 전진 영토의 절반 가량을 수복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을 넘어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부견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려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이들을 제압할 힘이라곤 없었고, 특히 서연이 자리잡은 화음이 수도 장안의 코앞이었던 관계로 본진을 수비할 병력마저 모자라 대다수의 지방은 포기하고 장안으로 집결시키기에 급급한 상태였다. 결국 전진은 비수대전에서의 대패 이후 불과 1년 만에 장안 정도를 빼면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국으로 전락해버렸다. 385년 서연(西燕)은 끝내 [[시안(도시)|장안]]까지 도달했고 지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부견은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전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결국 부견은 장안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과거에 신하이던 요장은 옥새를 요구했으나 부견은 요장을 마구 꾸짖으며 거절했고, 요장은 그를 신평의 한 절에 감금했다가 후에 교살했다. 그리고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뭔가 찬양과 비하를 섞은 듯하다. 부견의 핏줄은 대부분 도륙났지만 그나마 부견의 서자인 부비가 뒤를 이어 전진은 겨우 버텼다. 그러나 그도 1년 만에 후진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며 일족인 부등, 부등의 아들 부숭이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394년 부숭이 걸복부의 서진군에게 잡혀 죽으면서 전진은 아예 멸망했다. 당시 동진의 재상이었던 [[사안(동진)|사안]]은 승전보가 올 무렵 100만 대군을 맞아 불안해하는 조정과 병졸들을 안심시키려고 지휘 천막 안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다. [[효무제(동진)|열종 효무제]] 사마요[* 동진의 제13대 황제]가 보낸 사신이 전황은 어떤지 묻자 역시 바둑이나 한 판 두자며 사신을 바둑판에 앉혔다. 한참 [[바둑]]을 두고 있다가, 승전 [[보고서]]가 도착하자 눈으로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한쪽으로 치우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사신이 보고서에 뭐라고 써있었냐 묻자 담담하게 >"우리 애송이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구려." 라고만 말했다.[* 당시 동진군 총사령관이었던 사현은 사안의 조카였고 그 밖에도 사안의 동생 및 아들 등이 참전해서 이들을 '우리 애송이들'이라 부른 것이었다.] 그래도 기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해서 바둑돌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그만 원치 않는 자리에 잘못 두었는데, 이를 본 사신이 >"나쁜 수로군요." 라고 지적하자 사안은 >"이 정도에 동요하다니 늙어서 주책이군요." 라며 허허 웃었다.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야 막사에서 기뻐하며 날뛰었고, 문턱에 [[나막신]]이 부딪혀 굽이 박살나는데도 모를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동진은 군사를 보내 전진을 공격했다. 384년에 응양장군 유뢰지가 환성, 상용태수 곽보가 위흥, 상용, 신성 등 세 군을 함락시켰다. 또한 양전기가 성고를 점령하고 전진의 양주자사 반맹을 격파했다. 경릉태수 조통이 양양을 공격해 전진의 형주자사 도귀를 달아나게 했고, 전진의 낙주자사 장오호는 풍양을 점령한 후 동진에 투항했으며, 사현 및 환석건과 함께 북벌을 단행해 전진의 서주자사 조천을 팽성에서 쫓아내고 점령했다. 9월에는 사현이 팽성의 내사 유뢰지를 시켜 전진의 연주자사 장숭을 공격해 견성을 점령하고 하남의 성보들을 모두 귀순시켰으며, 음릉태수 고소가 전진의 청주자사 부랑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기세가 오른 동진은 전진을 공격해 연주, 청주, 사주, 예주 등을 평정했다.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그러나 중국 대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수적인 열세를 딛고 비수대전에서 멋지게 승리한 동진은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더욱 마음 놓고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했다]]'''. 효무제 사마요가 후궁한테 >"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내일부턴 탱탱한 애들 끼고 잘란다." 라고 농담했다가 열받은 그 후궁이 [[상관 살해|자던 황제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을 정도]]였다. 결국 동진은 비수대전의 승리의 주역이던 북부군의 쿠데타로 나라의 기반이 무너졌고, 북부군 사령관 유뢰지(劉牢之)의 부하였던 [[유유(송무제)|유유]](劉裕)에 의해 [[멸망|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멈출 수 있었던 [[붕괴 후 혼란기|혼란스러운]] 난세는 이후로도 206년 동안 계속되었고, 나중에 [[수나라]] 고조 문제 [[양견]]이 남북조를 통일한 589년에서야 끝나나 싶더니 이 항목과 비슷한 [[살수대첩|살수 전투]]를 저지르고 다시 혼란기인 [[수당교체기]]가 왔다가 [[당(통일왕조)|당나라]]가 들어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