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후궁) (문단 편집) == 개요 == 한자 표기는 [[嬪]]([[간체자]]: [[嬪|嫔]]). [[내명부]] 소속으로 왕비(妃)의 아래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후궁]] 품계 중 정1품이며 종1품인 [[귀인 #s-1|귀인]]보다 윗전이다. 후궁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 특히 임금의 말년에는 빈이 여럿 되는 경우가 생겨 버려서,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앞에 붙일 수 있는 호(號, 이름)를 각 빈에게 하사했으며 이를 '''‘봉호(封號)’'''라고 한다. 조선 왕실에서는 '''경'''([[敬]]·[[慶]]·[[景]]), '''영'''([[寧]]·[[令]]·[[暎]]), '''정'''([[靖]]·[[靜]]·[[貞]]), '''의'''([[懿]]·[[宜]]), '''숙'''([[肅]]·[[淑]]), '''희'''([[熙]]·[[禧]]), '''신'''([[愼]]·[[信]]), '''명'''([[明]]·[[䄙]]), '''혜'''([[惠]]), '''성'''([[誠]]), '''공'''([[恭]]), '''선'''([[善]]), '''효'''([[孝]]), '''소'''([[昭]]), '''근'''([[謹]]), '''화'''([[和]]), '''창'''([[昌]]), '''인'''([[仁]]), '''안'''([[安]]), '''순'''([[順]], [[淳]]), '''온'''([[溫]]), '''원'''([[元]]), '''현'''([[賢]]), '''수[* 綏는 유로 읽기도 하였다.]'''([[綏]], [[粹]]) 등 30여 개 봉호가 쓰였다. 경빈, 영빈, 정빈, 의빈, 숙빈, 희빈 등과 같은 식이다. 임금의 세대가 다르면 굳이 구분하지 않고 중복하여 쓸 수 있었다. 대신에 한자를 달리 쓰는 편이 일반상 관례였다. 세간에 ‘희빈이 숙빈보다 높다’같은 잘못된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이러한 봉호는 고유한 이름일 뿐 품계상 모두 동등한 지위를 나타낸다.[* 세자의 모후 여부, 왕자 출산 여부, 출신 가문, 나이나 입궁 순서에 따라 ‘빈’ 내에서도 암묵적인 상하대는 있었다고 한다. ] 품계상[* [[폐비 윤씨]]와 [[장희빈|희빈 장씨]]처럼 후궁에서 왕후가 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위의 두 사람 모두 생전에 왕후 자리를 지키지 못했는데, 폐비 윤씨는 폐서인이 되었고 희빈 장씨는 왕후에서 다시 후궁으로 격하되었다. 사후 폐비 윤씨는 연산군 때 제헌 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중종 때 다시 환원되었고, 희빈 장씨는 사후 장례의 품격도 사당도 보통의 빈과는 달리 왕후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희빈 장씨 이후에는 후궁이 왕비로 승격될 수 없도록 법제화가 되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후궁이 왕후가 되는 경우는 두 번 다시 존재할 수 없었다.] 삼정승과 동일한 정1품이나 아래의 경우처럼 무품인 경우도 있었다. 반면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빈은 황귀비-귀비-비에 이은 높은 지위에 속하기는 해도 조선의 빈과 같은 으뜸 후궁은 아니었다.[* 왕조에 따라 황후 바로 아래인 최고위 후궁에게 '황귀비'가 아닌 '귀비'를 주는 경우도 있었고 '비'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종주국과 제후국의 차이 때문으로,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했기 때문에 궁중 용어를 중국 황실에 비해 한 단계씩 낮춰 써야 했다. '빈'은 '비'보다 바로 아래인 봉작인데, 제후국에서는 '비'가 군주의 정실부인에게 주어지는 지위이므로 제후국의 '빈'은 '왕비' 바로 아래인 최고위 후궁이 되지만, 종주국에서는 '비'도 일개 후궁일 뿐이므로 그 아래인 '빈'이 최고위 후궁일 수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