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관(역사) (문단 편집) ==== 유명한 사관 ==== >국왕 [[태종(조선)|태종]]: "사관의 붓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전 밖에 있더라도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史筆宜直書. 雖在殿外, 豈不得聞予言? > >사관 민인생: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臣如不直, 上有皇天. >---- > -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태종 1년(1401년) 4월 29일. 태종이 왕이 평소에 기거하는 편전까지 사관이 입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이를 두고 태종이 민인생과 논쟁을 하는 기록이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 사관 중에서 가장 네임드를 꼽으라면 역시 맨 위의 어록을 다 적은 태종 시대의 민인생(閔麟生)[* 사실 사관은 사초를 제출할 때 익명으로 제출하거나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거의 기재하지 않으므로 대부분의 사관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유명한 인물이 사관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사관으로 유명하지는 않다. 사관으로 유명한 사람은 굵직한 사건인 [[무오사화]] 때 알려인 김일손 정도가 현재까지 민인생을 제외한 이름이 알려진 사관이다.]이다. 실록을 쓰려고 고위 관료만 참석할 수 있는 연회 때 몰래 따라가고, 얼굴을 가리고 태종의 사냥을 쫓아가는 등 거의 사관이라기보단 '''[[스토커]]'''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러다가 하도 당한 태종이 편전입시를 허락하지 않아 휘장 안에 숨어 엿본 것이 발각나 귀양을 가게 되면서 결국 그 전설의 막을 내린다. 이 내용 또한 실록에 작성되면서(...) 후손들에게 전달되고 말았다. 태종의 이미지 실추는 덤. 조선왕조실록과 사관들의 비범함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왕께서 말에서 떨어졌는데 '''사관 보고 이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라는 [[http://sillok.history.go.kr/id;jsessionid=66C99436BF25D3B5D480E74E2BC8789D/kca_10402008_004|기록]]도 바로 태종 때의 기록이다.[*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2월 8일 기묘 4번째 기사. 참고로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인기검색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또한 태종도 민인생이 어지간히 싫었는지 그를 직접 욕한 것을 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 [youtube(-tpCbvhtVnE)] [[천일야사]]에서 묘사한 민인생과 태종의 갈등. --이미 썸네일부터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태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기록하는 민인생의 집념과, 그런 민인생에게 시달리며 고통받는 태종의 분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여담이지만 실록에서 검색해보면 민인생은 귀양갔다 돌아온 이후로도 금성 현령이나 한성부 판관 등을 역임하다 이런 저런 사유로 파면 혹은 강등당하는 등 순탄치 못한 벼슬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 여담으로 세종대왕이 태종실록을 보고자 하는 논의가 세종 13년 3월부터 있었는데 민인생의 인명이 언급되는 시기가 세종 13년 5월까지니 (후세에 재평가를 받았는지 직첩을 돌려 받았다) 대략 이 시기까지는 생존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세종이 보았다면 그의 기록벽으로 인한 태종과의 다툼, 말에서 떨어진 일화까지 기록해놓은 것을 보고 가만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동생인 위숙공 민의생(생몰: 1379~1444)은 이조참판, [[경기도]] · [[경상도]] 두 곳의 관찰사, 예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할 정도로 벼슬살이가 순조로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