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군자 (문단 편집) == 시초 ==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화목]](佛畫)이다. 최초에는 회화에 쓰이는 이 식물들을 가르키는것이 아닌 [[전국시대|중국 전국시대]]의 [[전국사군자|네 명의 인물]]들을 높이 받들고 기리기 위해 사군자라는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 '사군자'라는 개념의 성립의 시초 정도이고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 묵화의 소재로 알려져 있는것이 정설. 최초로 대나무가「[[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며, 대나무와 함께 매, 난, 국은 [[화조화]]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960-1126년) 때에 와서 여러 가지 고사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대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화목으로 등장하였다. 남송(1127-1279년) 말기부터 원대(1279-1368년) 초기[* 한국사로 비유하면 [[고려]] 중기~말기 사이]에는 몽골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둔생활을 하는 한족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골인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명대(1368-1644년)에 들어와서 이들 매, 난, 국, 죽 특유의 장점을 유교적 덕목과 관련시켜 칭송하는 문화적 전통이 수립되어서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겨난 것이다.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의 품격이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회화에서는 고려시대에 송나라와 원나라 회화의 영향으로 왕공사대부 사이에 묵죽, 묵란, 묵매가 널리 그려졌다. 조선초기에도 사군자가 문인들 사이에 계속 사랑을 받아 왔고 조선 중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수립, 후기에 와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회화, 그 중에서도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기질과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양 사상의 일맥으로서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여러 예술 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있다. 위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이는 꽃, 식물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함과 품격을 높이 산 것이 맞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