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기(역사책) (문단 편집) == 편찬 배경 == [[중국]] [[전한]]의 [[사마천]]이 상고 시대의 [[황제(중국 신화)|황제]]부터 [[한무제]] 태초 연간(기원전 104~101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했다. 본격적인 저술은 기원전 108년 ~ 기원전 9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대에서부터 자료가 준비되었으리라 본다면 저술에 들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 사마천은 저술의 동기를 >'''가문의 전통인 사관[* <태사공자서>에서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사관을 세습한 집안임을 밝히고 있다. 원래 아버지 [[사마담]]이 사서를 저술하려 했으나, 역사 기록과 함께 천문, 역법을 담당하던 태사령의 직책에 있었음에도 [[한무제]]의 봉선 의식을 수행하지 못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사마천에게 사서 저술을 당부하고 화병으로 죽었다.]의 소명 의식에 따라 《[[춘추#s-4]]》를 계승하고, 아울러 [[궁형#s-2]]의 치욕에 발분하여 입신양명으로 대효를 이루기 위한 것''' 으로, 저술의 목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루려는 것''' 으로 각각 설명하는데, 전체적 구성과 서술에 이 입장이 잘 견지되었다. '사기'라는 이름 자체는 한나라 사람들이 사마천의 《사기》 이전에 쓰이던 역사를 부르던 명칭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의 본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로, [[후한]] 말에 《태사공기》(太史公記)로 바뀌었다가 이후 사람들이 '''《사기》'''라 줄여 사용했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드물다. 《사기》(史記)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기'란 제목에서 '''기'''(記)는 글자 그대로 '''기록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史)의 원래 의미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기사자'''(記事者)라고 하여 >'문자를 이용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 을 가리킨다, 즉 우리가 아는 '역사'(history)란 개념이 아닌, '''직무의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사기》(史記)라는 제목은 >'''기록하는 직분을 맡은 사관(史官)이란 사람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다.''' 는 뜻이라 할 수 있다. [[https://www.100miin.com/detail.php?number=11258|출전]] 단, 분량 자체는 편수에서 연상되는 것만큼 많지는 않은 편인데, 현재 원문만 번역하여 낸 것이 6권 정도 분량이며, 원문은 글자수로만 따지면 526,500여 자로 24사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송사》의 1/4 수준이다. 참고로, 역시 편년체 통사인 《[[자치통감]]》(총 294권)은 번역본이 30권이 넘는다. 물론 《사기》를 실제로 읽어 보면 결코 분량이 적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책의 한 '권' 또는 '편'은 요즘 책의 한 '장'(章) 정도 분량이었다. 분서갱유와 초한전쟁을 거치며 원사료들 다수가 소실된 원인도 있지만 사마천이 살던 시기에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이라서 필연적으로 부피가 큰 [[간독]]에 기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휴대하기 적절한 부피로 나눈 각 '편'의 분량은 적음이 당연했다.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쓴 책으로도 유명하다.[* 사마천이 궁형을 감수한 이유에 대한 연세대 김선자 교수의 간략한 [[https://www.youtube.com/watch?v=iUlKYIHBb7c|설명]].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보고자 하면 [[사마천]] 항목 참조.]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을 [[고자]]로 만든 [[한무제]]를 비판했다.[* 국가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 절대 다수가 한무제 때 사람들이며, 창업자의 최대 적수였던 항우를 <열전>이 아닌 <본기>에 기록했다.] 사실 한무제에게 공격이 집중되긴 했지만 역대 중국 왕조와 비교하며 한나라 자체도 매우 비판한 편이다. 다만 현재의 황제를 비판한 부분은 후세의 가필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이를 근거로 [[채옹]]을 살려주지 않고 죽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