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기(역사책) (문단 편집) === 서술 태도 === 후대의 역사책과 비교하여 특기할 점은 명분과 정치 이념보다 '''실제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항우]]는 한때나마 천하를 제패한 [[패왕#s-1]]으로 인정하여 <세가>나 <열전>에 서술하지 않고 <본기>에 서술했다. 또한 전한의 제2대 황제인 [[혜제(전한)|혜제]]와 그의 뒤를 이은 [[전소제(전한)|제3대 황제 소제]], [[후소제(전한)|제4대 황제 소제]] 모두 [[허수아비#s-2]] 황제였기 때문에 그들의 <본기>는 아예 없고, 대신 <[[여후|여태후]] 본기>가 들어가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후한]]대에 나온 《[[한서]]》는 명분을 보다 중요시하여 [[항우]]는 <열전>에 넣고 혜제 대에는 <혜제 본기>를 따로 두었으며, 혜제의 뒤를 이은 두 명의 소제 시기만 <고후기>(高后紀)에 포함시켰다.] 《사기》가 [[전한]]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 시기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단히 과감하게 처사한 것이다. 그만큼 [[항우]]와 [[여후]]의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한 왕조 아래 살던 당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혹은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 왕조에 대해 심사가 좋지 못했던 점을 반영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 왕조의 찬양을 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항우의 격을 너무 낮추면 그에게 항상 패배했던 [[한고제|고조 유방]]의 격도 덩달아 낮아지지만, 항우의 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그를 패사시키고 한 왕조를 창시한 유방의 격 또한 높아진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하면 유방은 져도 이겨도 폄하되지 않는다. 유방이 지는 장면에서는 '항우가 이렇게 대단한 인간이니 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면 되고, 이기는 장면에서는 '항우가 이렇게 대단한데 그 항우를 이겼으니 얼마나 대단하냐.'라고 찬양할 수 있다. '그럼 그렇게 대단한데 왜 졌냐?'에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고 하면 그만이다.] 여후는 유방의 아내이고 제2대 황제의 어머니로 정치 쪽에서는 확실히 간섭을 많이 했으니 이를 완전히 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세가#s-1]]> 역시 실제로는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와 [[진승]][* 진승이 스스로 [[초나라#장초|장초]](長楚)를 세워 왕을 자칭했으나 자칭 왕이면 또한 왕이지 역시 제후는 아니다. 아마도 사마천은 진승을 제후로 인식하거나 제후급 영향력을 보였다고 평가하여 <세가>에 넣은 모양이다. 사실 [[한고조]]도 진승에게 왕위를 내리고 무덤을 관리하게 하는 등 대우했다.]을 <세가>에 넣었음도 특이하다. 공자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세가>가 아니라 <본기>에 서술된 그 어떤 황제들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이니 <세가>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공자가 처음으로 추시된 것이 전한 말기였으니, 꽤나 선구적인 태도임은 분명하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시점은 유학이 전한의 국가 이념으로 정립되던 시기로 [[유교]]의 정치 사상인 '명분론'이 확립되던 때였다. 사기가 모델로 삼았던 《[[춘추#s-4]]》가 역사비평서라는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유교적 명분론을 담은 정치 철학서로서 독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이색적인 서술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 역시 《춘추》를 대단히 고평가하긴 했다. 《춘추》를 두고 천자, 신하, 아비, 자식 모두 통달해야 할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는 유교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며, 공자가 세상만사를 포폄함으로써 세상에 큰 가르침을 남기려 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마천은 [[도가]]를 상당히 중요시했다. <태사공자서>에서 사마천은 각 제자백가를 평가했는데 도가를 두고는 편애가 느껴진다. 사마천은 도가의 가르침을 따르면 만물의 실체를 통달할 수 있으며 도의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군주가 지켜야 할 법도라고 적었다. [[유가(제자백가)|유가,]] [[법가]], [[묵가]] 등을 다룰 때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사정없이 드러내지만, 도가를 두고는 비판하지 않는다. 한나라 초기에는 진나라의 엄벌주의에 반해 <과진론>[* 진나라의 잘못을 논함]이 유행하고 무위의 치를 높이 사는 도가가 유행했는데, 사마천 역시 이 영향 아래 있었던 모양이다.[* 이 시기 유행한 도가 사상을 '[[황제(중국 신화)|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문'이란 뜻으로 '''황로학'''(黃老學)이라고 부른다.] 궁형을 받는 것 역시 사마천이 유학자였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을 형벌이다. 전한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사실상 허울이나 마찬가지였고,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고제]]부터 시작해서 [[한무제]]까지의 시기 중에서 유교가 정치 수준까지 영향을 미친 시기는 없다. 본격적으로 유교가 실제 정치를 포함한 의식 세계의 본질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은 제11대 황제인 [[원제(전한)|한원제]] 시기에 이르러서인데, 원제는 젊어서 유교에 심취했다가, 아버지 [[선제(전한)|한선제]]가 이러다가 나라 망치겠다고 하여 황위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실제로 한원제 이전의 한나라 유학은 우리가 아는 유학과는 다른 냄새가 많이 난다. 단적으로 전한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동중서는 <[[오행]]설>을 들고 나왔는데, 유가와 별개의 학설을 한무제의 지배논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 유가에 끌어다 붙인 것이었다. 사마천은 한대 유학이 내세운 (도참, 참위 등) 미신적인 믿음은 혐오했다. 이런 미신과 같은 유교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스며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신나라#s-2|신 왕조]]을 세운 [[왕망]]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만 사마천이 한대 유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선진(先秦)의 '유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했다. 젊어서 유학을 배운 영향도 있을 것이며, 공자의 《춘추》를 높게 평가한 점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본다면, 사마천은 어느 정도 유가적으로 《사기》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한나라의 유교는 이후의 유교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명분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하는 것도 한참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에서 돈을 들여 관리 감독하는 책이라면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구성되지만 국가가 본격적으로 감독한 것은 수•당대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법가]] 사상에 대한 비판이 지배적이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법치주의]] 비판이라기보단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이 항상 들어있다.[* 사실 또 이는 《사기》의 <열전> 중 <혹리열전>에 수록된 12명의 혹리들 중 10명이 엄벌주의, 원칙주의 등을 빙자한 편리주의를 한 것도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사마천은 그 10명은 비판하면서 나머지 2명인 질도와 장탕에 대해선 '참혹하다' 등의 평가를 내리면서도 '공정했다'거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등의 긍정적인 평가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