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라예보 (문단 편집) == 개요 == {{{+1 Сарајево / Sarajevo}}}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Coat_of_arms_of_Sarajevo.svg.png]]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행정구역)|수도]]이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이루는 두 구성체 중 하나로, 보스니아인(무슬림)+크로아티아계로 구성된다. 다른 하나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세르비아계)]과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수도이다. 면적은 141.5㎢, 인구는 [[2013년]] 기준 369,534명으로 굉장히 적은 편이다. 인근 도시권을 포함하면 688,354명. 민족구성은 2013년 기준으로 [[보슈냐크인]] 80.74%, [[세르비아인|세르비아계]] 3.78%, [[크로아티아인|크로아티아계]] 4.94%, 기타 10.54%이다. 내전 이전에는 최대 민족인 보슈냐크인의 비중이 절반이 안 될 정도로 민족조성이 다양한 곳이었다. '사라예보'라는 이름의 유래는 [[오스만어]]로 '보스니아의 궁전'을 가리키는 단어인 '사라이보스나(Saraybosna)'가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슬라브화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시작된 사라예보의 역사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튀르키예어로도 사라예보는 사라이보스나라고 불린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사라예보 사건]]'''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을 도시로, 그 이후에도 현대사에 굵직한 사건을 남긴 도시이기도 하다.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인데 이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유고슬라비아]]의 도시 자격으로 치렀다. 한국인에게는 [[1973년]] ITTF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김순옥, 박미라, 정현숙이 대한민국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 세계 제패를 한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사라예보는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소박하고, 인구밀도가 낮다. 무슬림 지구를 한번 돌아보면 [[튀르키예]]의 중소도시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도 도시가 계곡의 너른 지대에 형성된 도시다보니 여타 옛 유고슬라비아권 대도시의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고, 사진에도 나와있듯 언덕 중턱에 지은 집들도 상당히 많다. 이때문에 체감 인구밀도는 좀 있는 편이다. 그나마 사라예보 서쪽에 위치한 일리자(Ilidža)가 사라예보 광역권의 신도시로 사라예보 시내의 인구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몇몇 관광식당을 제외하면 물가도 상당히 저렴하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이쪽 주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총을 들고 싸우면서 엄청난 난민이 발생하여, [[1991년]] 52만 명에 달했던 인구가 [[사라예보 포위전]] 이후 30만 명으로 급감한 뒤 수십 년 넘게 제대로 회복이 안 되고 있다. 죽은 사람들도 워낙 많아서 시내를 둘러보면 정말 곳곳에 묘지가 위치해 있다. 이 당시 1,425일간 포위를 당해 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포위당한 도시로 기록되었다. 그 참혹했다던 [[레닌그라드 포위전]]보다도 훨씬 오래 갔다. 이 때 사라예보의 여성들은 '''[[제노사이드]]에 더하여 심지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강간]] 피해'''까지 입는 비극을 겪었으며, 이 사건은 〈그르바비차(''Grbavica'')〉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거기다가 '''저격수 거리'''라는 후에 이름까지 붙여진 곳에서는 저격수들이 높은 건물에서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쏴 죽였다. 거짓말 안 보태고 '''어젯밤만 해도 함께 파티를 하며 친하게 지냈던 옆집 아저씨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옆집 아저씨네 어린 아들은 쏴 죽이고 어린 딸은 강간하는 끔찍한 비극'''이 비일비재했다. 이 일을 겪은 후로 지역사회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사회적 갈등이 치유되지 않은 채 그 여파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 문서도 참고. 종전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총탄자국이 남아있는 건물이 많이 남아있으며, 내전 당시 시가지 외부와의 연결고리였던 '사라예보 터널'은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일명 '희망의 터널'로 불리는 곳으로,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소재한 부트미르(Butmir)에서 사라예보 국제공항 활주로 밑을 통과해 사라예보의 시계지역인 도브리냐(Dobrinja)를 잇는다. 건설 당시에는 이 두 지역을 잇는다 해서 'Objekt D-B'로 불렸다. 당시 사라예보 국제공항은 UN평화유지군이 관리하던 곳이어서 [[사라예보 포위전]] 당시 이 터널을 통해 여러 구호품들을 안전하게 이송하는 보급로로 활용됐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집트]] [[카이로]] 등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내전 이후에는 발전을 하고 있고 무슬림들이 다수인 도시 특성상 술을 팔지 않는 가게가 늘어나고 있고, 내전 이후에 히잡을 쓰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2&aid=0002035747|#]] 최근 보스니아 정부는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에 의한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를 우려하여 공공 장소와 법원에서 히잡을 쓰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슬람 근본주의 자체를 우려하기보다는, 이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세르비아인|세르비아계]]([[정교회]])와 [[크로아티아인|크로아티아계]]([[가톨릭]])와의 분쟁, '''이로 인한 [[전쟁]] 재발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보스니아에 분쟁이 터지면 '''즉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을 천명한 상태이다. 약간의 불씨가 또다시 [[발칸 반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