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로국 (문단 편집) ===== 배경 ===== '''육촌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로는 [[전덕재]]와 [[주보돈]] 등이 있다. 그들은 육촌의 내용에 나오는 [[유리 이사금]] 대의 6부명의 개칭, 6부에 대한 성씨 하사, 17관등제의 정비, 그리고 촌(村)의 용어 문제에 대해 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리이사금 9년(A.D 32)에 기존의 6촌(村) 이름을 6부(部)로 바꾸고, 각 부마다 성씨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또 17개의 관직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촌(村)이라는 명칭 문제이다. 촌(村)은 마을을 뜻하는 일반명사로서 현재까지 흔히 사용되지만, 중국 후한(後漢)대까지만 하더라도 '마을'을 지칭할 때 촌(村)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취(聚) 혹은 오(塢)를 사용하였고, 촌(村)이 지금의 마을의 의미로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부터이다. 한국을 포함하는 동이(東夷)지역[* 오환, 선비, 고구려, 삼한, 일본 등을 포괄하는 이름 그대로 중국의 동쪽 지역을 지칭함.]의 정치체들 역시 마을을 뜻하는 의미로 촌(村)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 때까지는 부(部) 혹은 읍락(邑落)이 기본 단위로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최초의 촌(村) 사용은 4~5세기대로 생각되며, [[광개토대왕릉비]]가 가장 빨리 확인되는 사료이다. 신라에서는 501년에 만들어진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서 최초로 확인되고 있고, 기존 연구성과를 통해 볼 때 5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촌(村)을 기초 마을 단위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사로 6촌으로 등장하는 지명 문제를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촌의 이름은 각각 양산촌(楊山村), 고허촌(高墟村), 대수촌(大樹村), 진지촌(珍支村), 가리촌(加利村), 고야촌(高耶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이름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초기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7세기 이후에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허촌의 고허라는 지명은 [[진평왕]] 때 등장하고[* 48년(서기 626년), 8월 고허성(高墟城)을 쌓았다. 四十八年 八月 築高墟城], 대수촌의 대수는 태수방(太樹坊)이라는 명문기와[* 박방룡, 2013년,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p.394]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방(坊)이란 바둑판모양으로 구획한 도시의 네모 한 칸(블럭)을 의미한다.[* 요즘 신도시의 네모난 도시구획을 생각하면 된다.] 이 방(坊)의 정립시기에 대해서 논란은 있지만, 대체로 7세기 이후에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에 대수촌 역시 7세기 이후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또 진지촌의 진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빈지(賓之)라고도 부르는데, 통일신라 때 신라 귀족들이 살았다는 39[[금입택]](金入宅) 중 하나로 빈지택(賓支宅)이 나오고 있어 역시 7세기 이후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6부의 명칭은 현재 신라에서 가장 빠른 금석문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단계부터 계속해서 그 명칭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부(部)가 6촌 지명보다 빠른 시기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사견이지만 나머지 지명들은 아예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6촌의 실재가 의심스럽다. 예를 들면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돌산(突山),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의 무산(茂山),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취산(觜山), 그리고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은 전부 그 지명을 찾을 수 없다. 그 중 금산 가리촌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개령군조에 금산현(金山縣), 성산군조에 가리현(加利縣)이 등장하고 있어 그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물론 후대에 그 지명이 소멸되어 못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대체로 지명이 잘 남아있는 경주에서 이 지명들을 가지고 어디라고 추측할 만한 연결고리 자체가 없다는 것이 의문스럽다.] 한편 6촌 중 진지, 가리, 고야는 고유어 음차로 보이는 반면 양산, 고허, 대수는 한자식 이름이므로 촌이라는 용어와 함께 후대에 붙여진 것이란 설도 있다. 세 번째는 성씨(姓氏) 사용 문제이다. 신라에서 최초의 성(姓)을 사용한 사람은 기존 연구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진흥왕]]이다.[* 이후 김씨, 박씨 등으로 나뉘어진 혈족 개념은 그 전에도 물론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진흥왕 대에 비로소 중국식 성씨를 사용하고 그것을 멀리 혁거세까지 이어지는 선조들에게 소급했다는 것이다.] 이후 귀족들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를 지나서이고, 특히나 유리 이사금이 6부에 하사했다는 성씨 중 일부는 8세기 이후부터 사용한 성씨임이 확인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7관등제 성립은 [[법흥왕]] 이후로 생각되는데, 이는 신라 금석문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관등명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관등명의 등장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전덕재]]와 [[주보돈]] 등은 이에 따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6촌은 6부의 명칭이 부회되어 후대에 설화형태로서 생겨난 것이며, 이 설화가 등장한 것이 신라 중대인 7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대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6부(部)에 주목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6부가 연합한 육부체제가 형성된 것이 사로국이라고 본다. 다만 [[주보돈]]은 이러한 육부체제의 형성이 마립간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므로, 여기서는 전덕재의 견해만을 보도록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