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로국 (문단 편집) == 형성 과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사로 6촌(사로육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529|#]] A. 알천양산촌 경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 경주시내, 월성(月城)부근, 경주 남쪽, 남산(南山) 서북쪽 등으로 약간 차이가 있다. B. 돌산고허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대체로 상주로 보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남천(南川)의 서쪽이나, 서악동 일대로 보고 있다. C. 무산대수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제천과 예천, 또는 의성과 제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경우, 모량리나 건천 일대로 파악한다. D. 취산진지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성주 또는 영해, 울진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인왕리, 또는 조양동, 또는 월성과 황룡사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E. 금산가리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김천·성주로 보거나, 개령·성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소금강산 또는 명활산(明活山) 부근, 천북면 일대 등으로 본다. F. 명활산 고야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경주·영천 지역이나, 경산·영천 지역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경우, 명활산이나, 보문리 일대, 또는 황성리 일대로 보기도 한다. 이를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파일:경주 사로6촌.png]] [[파일:경북 사로6촌.png]]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사로 6촌과 사로국의 건국 과정에 대해 설화 형식으로 자세히 나와있다. > 이에 앞서 [[고조선|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촌(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뛰어나고 영리하며 몸가짐이 조신하였다.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박【匏, 조롱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커다란 알이 마치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으로 한 것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임금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 >'''《삼국사기》''' ---- >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다.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가 있다. 그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嵒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李)씨의 조상이다. 【노례왕 9년(서기 32년)에 부를 두고 이름을 급량부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서기 940년)에 중흥부(中興部)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잠(波潛)ㆍ동산(東山)ㆍ피상(彼上)ㆍ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다.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 형산(兄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다. 【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량을 혹은 탁(涿)이라고도 하는데 읽을 때는 역시 도(道)라고 한다.】 지금의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ㆍ마등오(麻等烏)ㆍ도북(道北)ㆍ회덕(廻德) 등의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은 구례마(俱禮馬)【구(俱)를 구(仇)라고도 한다.】이다. 처음엔 이산(伊山)【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량(梁)을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孫)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다. 【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나 빙지(氷之)라고도 한다.】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본피부(本彼部) 최(崔)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의 남쪽에 옛 터가 있다. 여기가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맞는 것 같다.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이다.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 촌장은 지타(祗沱)【지타(只他)라고도 한다.】이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곧 한기부(漢歧部)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ㆍ하서지(下西知)ㆍ내아(乃兒) 등의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다.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 금강산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薛)씨의 조상이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ㆍ잉구며촌(仍仇旀村)ㆍ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이 여기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서기 32년)에 비로소 여섯 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여섯 성(姓)을 내려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라 하고 장복부를 아버지라 하며, 임천부를 아들이라 하고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기원전 69년)【고본(古本)에는 건호 원년 또는 건원 3년이라 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 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 왕이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아마도 우리말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이것은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면서 ‘어진 이를 임신해서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룡(雞龍)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어찌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에 ‘알지(閼智) 거서간(居西干)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후로 왕의 존칭이 되었다.】 >---- >'''《삼국유사》'''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사로 6촌이 내부적으로 통합하여 사로라는 정치체를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로 6촌의 존재 여부와 위치 등에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사로 6촌의 실재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왜냐하면 사로 6촌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사로 6촌이 통합하여 사로라는 정치체가 등장한 것이고, 이를 부정한다면 또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촌 존재를 인정하는 학설은 6촌에서 나중에 6부로 이름이 변화된다고 보고, 6촌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는 6촌이라는 명칭은 신라 중대에 설화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다. 또 이 학설은 사로국의 형성을 6부의 형성과 통합이라는 입장에서 본 연구와 6부의 존재여부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고고학적인 유물/유적을 통해 그 성립과정을 밝히는 연구가 있다. 아래에서는 6촌의 존재를 인정하는 학설과 인정하지 않는 두 학설을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입장을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