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림파 (문단 편집) === 비판 === 시작이 그리 교조주의(敎條主義)적이지 않았든 어쨌든 간에, '''사림파가 초반부터 가졌던 문제점이 결국 조선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악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문제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것과 관련해 점차 시간이 흐르며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성리학이 변질되면서]] 점차 조선을 망가뜨려갔다. 그나마 견제 세력이 살아있던 훈구파 시절이나 붕당정치가 작동하고 있던 시기에는 그나마 정상적이었으나 순조 이후 노론 시파가 조정을 장악하면서 사림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단 사림파가 전형적인 [[성리학]] 엘리트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이 엘리트의 판별 기준에서 실무 능력보단 학연 쪽에 기울어진 것이 문제이다.[* 애초에 이들이 등용되는 과거제도라는 것 자체가 유교 학문이 주된 과목이었고 실무를 검증하는 부분은 잡과라고 하여 기본적으로 문과보다 낮게 보았고 문과와 달리 오를 수 있는 관직도 제한되었으며 문과가 오를 수 있는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다. 과거제 자체에서부터 벌써 문제가 있던 것. 즉 과거제의 구조상 성리학 엘리트들만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청요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특정 자리만 잘 잡는다면, 현장 경험과는 아무 상관없이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낙하산 인사|실무 경험이 아예 없거나 몹시 부족한 자가 관직에 앉으면]] 그 능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며, 그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는 가히 인재(人災)를 넘어 천재(天災) 수준까지 가기도 한다. 특히 사림파가 이전의 [[관학파]]에 비교하면, 실무 능력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받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 폐단 때문이다. 물론 훈구파도 홍윤성 같은 인간 백정 양아치들이 패거리 잘 타서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지만 여기는 최항이나 신숙주 같은 일부 관학파 출신이 포함되어 있어 사림파보다는 조금은 낫다.[* 홍윤성과 같은 사례는 정통성 없이 찬탈로 정권을 잡은 세조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과도하게 공신을 만들고 이들의 힘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비정상적인 사례다. 조선 초기만 해도 단순히 공자왈 맹자왈만 잘 한다고 [[고관대작]]에 오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역관이나 의관과 같은 실무직들도 나름의 대우를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영실. 그는 노비출신에서 면천되어 관직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세자인 문종과 함께 연구하여 측우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성종조차 사림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능력 있는 중인들을 문관 및 무관으로 등용했다. 또 황희나 조말생같은 조선 초 네임드 정승 판서급들의 실무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이 조선 중후기 같으면 당장 탄핵되었을 법한 대형 부패 스캔들에도 버틴 건 이들 없이는 행정을 꾸리기 힘들다는 세종의 판단 덕이다.] 사림파가 실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이념에만 치우친 것을 극명히 드러내는 유명한 예시가 또 있는데, 성종 시절의 [[창경궁 통명전]] 연못 수통 사건이다. 통명전 옆 연못에 물을 대는 수통이 나무로 된 거라서 다 썩어버렸기에, 성종의 명에 의해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구리로 새 수통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림파 대간인 정성근[* 진주 정씨 공대공파. 부친은 훈구 대신인 정척인데 성향은 완전한 사림이다. 정척은 계유정난으로 사사된 정분의 먼 친척(11촌)으로, 관학/훈구/사림을 가문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예시중 하나다. 이 때문에 훈구가 사림을 쓸어버리고 싶어도, 아버지는 훈구인데 아들은 사림인 경우가 많아서 쓸어버릴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림을 [[강남 좌파]]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이 사치라고 간하는 바람에 구리 수통을 부수고 돌로 만들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동재보다 석재 수통 제작비가 훨씬 비쌌다. 이 석재 수통은 지금도 창경궁 통명전지에 남아있다. 만약 공임비가 더 드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임금의 이미지 메이킹을 강조하거나, 포를 만드는데 필요한 귀중한 구리를 저런 곳에 쓸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면 납득할만한 하나, 실무능력이 전무해서 단순히 돌보다 구리로 수통을 만드니 사치라고 억지를 써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더 비싼 것으로 대체하게 한 것.[* 참고로 이 사태를 만든 대간 정성근은 성종의 국상을 이일역월제로 치르는 것을 비판하고 혼자 [[삼년상]]을 치러 연산군에게 어그로를 끌었고, 이 바람에 [[갑자사화]] 때 세트로 사사된다.] 이 때문에 사림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이후로는 조선의 정치가 점점 백성들의 현실과 이격된 채 뜬구름 잡는 정치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덕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 덕치를 베푸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이 전무한 채 공자왈 맹자왈만 반복하는 사람들이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여말선초의 혼란기와 [[집현전|세종대왕의 신밀레]] 덕분에 현실인식과 실무능력이 없는 무능아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던 관학파나, 그 유산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훈구파와 달리, 사림파 집권기에는 '''현실인식, 실무능력은 전무한 도덕주의 교조주의자들이 [[학연|학맥]]이라는 낙하산을 타고 실무경험 없이 [[청요직]]을 거쳐 고위직에 떨어지니,''' 당연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학맥 낙하산도 문제지만 실무 경험 없이 [[삼사(조선)|삼사]]와 대간 경력만으로 고위직이 되는게 가능했던 조선의 승진체계가 [[수포자]] 조광조 같은 교조주의 무능력자들이 고위직에 진입할 수 있게 만든 대표적인 원흉으로 꼽힌다. 대조적으로 후술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는 직책에 관계 없이 입사 직후 3개월 동안 생산라인 현장에서 업무를 체험 내지 직접 수행하도록 한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제조업 회사인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에서 CEO와 임원진으로 전문적인 관련 지식이 있는 전화기, 재료, 컴공, 물리학과 졸업자들이 사내정치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현장 경험과 기술 전문 지식이 하나도 없는 법률자문, 영업부서 출신 인사들만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또한 비교적 과학기술, 경제, 법률, 신무기 개발, 국방 시스템 등 실학에 우호적인 관학파와 [[훈구파]]들에 비해 과학기술과 군사를 천시하여, 세종 때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해 조선 초중 때 절정을 이뤘던 조선의 과학기술과 군사력 발전을 저해시켰다.[* 사림의 시초중 한명인 김종직은 세조에게 "왕이 잡학에 집중해서 쓰나요?" 라고 말해 미움을 받아서 파직된 이야기도 있다.] 특히 사림의 사상적 시초인 조광조는 대놓고 실무에 필수적인 학문인 [[수학|산학]]을 천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과학기술은 정체되어 있었고 조광조 처럼 수학을 천시한 이도 있었지만 천문학과 수삭부분은 꾸준히 연구를 이어갔다.] 권력을 잡은 사림은 점차 고려말 권문세족과 조선초의 훈구파처럼 새로운 기득권층으로써 사회개혁과 변화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피지배층의 신분상승과 신분상승한 피지배층에 대한 차별도 성리학적 명분을 이용해 훈구파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 조선에서 남녀차별과 서얼차별이 심해지고 가부장제가 강화된 시기가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이 교조화되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들은 '남자는 남자의 할 일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라는 의미일 뿐인 음양사상을 이상하게 왜곡해 남존여비라는 해괴한 원칙을 만들어냈다. 다만 남존여비적인 면모는 이미 태종 시절부터 보이고 있었다.] 위의 김종직 예를 보듯이 김종직도 유자광의 단지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미워하고 배척하였으며 그 외에도 나라에 공을 세워 신분상승된 사람들을 배척하는 등 권력과 신분이동에 반대하였다.[* 한 보기로 노비에서 시작해 출세를 거듭해 형조판서까지 간 [[반석평]]도 사림들 등쌀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사관이 "사람을 능력보고 써야지 가문보고 쓰면 되나?" 라고 기록했을 정도.] 이후 박제가 같은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거나 거상으로서 나라에 공을 세워 관직에 오른 임상옥 또한 과거 신분에 의해 박해받는 등 문제를 남긴 부분인 건 분명하다. 그놈의 신분제 때문에 인재들만 쳐버린 격. 물론 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있던 일이다만. 붕당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비판을 하자면 사림파의 시초라 할만한 [[김종직]]과 [[김일손]] 사제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만 옳다는 태도를 보이고 주어진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광조]]의 경우에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데다가 자신이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들을 죄다 소인이라 몰아세우며 천민 출신의 공신을 옥사시키는 등, 신분 차별 문제마저 있었다. 이로 인해 별 문제없던 인물들마저 그들을 모함한 소인배로 후대에 알려지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동문들이나 제자들, 그리고 유능한 관료들까지 말려들어 후대에까지 불이익을 당하게 만드는 문제를 일으켰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가끔 무오'''史'''화라고도 하는 것도, 사림의 권력쟁취에 사실상 영수(領袖 리더) 역할을 했던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史草)를 기록하면서 일으킨 경솔함이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행위는 [[역모]]라 해도 할 말 없는 중죄였다. 더 큰 문제는 실무능력도 없고 현실도 모르지만 나는 대인이고 군자라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답게, 처음엔 자신들이 한 짓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인식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자세한 것은 [[무오사화]] 항목 참조.] 근데 이걸로 끝나면 그냥 눈치 없고 일 더럽게 못하는 무능한 눈새 정도지만 사림의 영수 노릇을 한 김종직은 '''자신이 비판한 세조 정권에서 출세하고 봉록 먹은 작자다.''' 세조를 '''비판하는 의도'''에서 쓴 조의제문을 쓴 작자가 '''세조 정권에서 출세한 김종직'''이라는 것과 그 김종직은 누구보다 충의와 절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걸 감안하면, 그리고 그런 스승의 부끄러운 행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변명해댈 뿐이다.[* 예를 들어 무오사화가 끝나고 얼마 안 되었을적에 유생들이 난언을 하다 잡혀죽은 사건이 있는데, 이 때 유생중 1명은 김종직을 두고 충신이라 말했다. '''세조의 밑에서 일했으면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고 그러면서 단종을 위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작자'''[* 오히려 성종실록 14년 7월 27일자 기사에서 대간이 송영이 난신(단종의 장인 송현수)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체직을 청했는데 성종은 이에 병자의 난(당시에는 사육신들이 세조 암살을 꾀하다 실패한 일을 말한다.)에 송현수는 가담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이 급제하기도 했으니 문제될게 없다고 하자 김종직이 송현수는 '''난신이라 말한다.''' 물론 사육신의 난과 관련되어 있으니 김종직이 어떤 의도에서(사육신이 세조를 죽이려고 한 행위가 옳았다고 여기는지 그르다고 여겼는지) 난신이라고 했는지에 따라서 얘기가 좀 달라지긴 한다.] 그 집단은 무능한 눈새 정도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 너무 후한 평가다. 무능한 눈새로 끝나면 그래도 그들의 정체성 자체는 지킨 셈이므로 '그래 뭐, 무능하긴 한데 자기 길은 지키네...' 정도로 끝나지 이건 자기 정체성마저 제손으로 파괴해서 이도저도 아닌게 된다.] 현대 한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 특히 [[씹선비]]와 같은 비하가 생긴 배경에는 사림파들의 영향이 가장 컸다. 심지어는 사림파를 현대 한국의 운동권 출신 진보 진영(통칭 586 세대, 강남좌파)에 빗대어 비판하기도 한다.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5429|#]] 실용보다 이론/이상에 매달리고,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매도, 비하하는 공통점을 보였다는 것. 다만 지방 향촌 지주라는 사림파 배경은 강남좌파로 대표되는 우촌좌도의 배경이 강한 진보세력과 반대인 부분도 있으며, 반대파에 대해 종북몰이를 하는 보수 일각을 기득권 양반 전체로 보는 반론도 있다. 세도정치가 사림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림이 조선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실무 능력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조선의 주요 세력이었는데 유능한 사람이 그만큼도 없으면 그게 더 큰 문제다.[* 사림이 독점적으로 집권한 300여년 동안 실무적 능력이 출중한 관료, 명재상으로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김육]], [[최명길(조선)|최명길]], [[윤휴]], [[채제공]]등이 꼽히는데, 사림 이전에 겨우 50년 동안 존재한 관학파 신료들 중 실무적으로 출중한 이들로 [[정도전]], [[조준(조선)|조준]], [[하륜]], [[황희(조선)|황희]], [[맹사성]], [[허조]], [[조말생]], [[윤회(조선)|윤회]],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남지]], [[정분]], [[정인지]], [[최항(조선)|최항]], [[신숙주]] 등이 꼽힌다. '''사림 집권기가 관학파 집권기보다 6배 이상 긴데 사림 중에 실무능력이 우수하다고 꼽히는 사람의 수가 관학파의 것보다 적다. '''심지어 앞서 기술한 사림출신 명재상 중 [[윤휴]], [[채제공]]은 후술하였듯이 [[남인]] 출신으로 사림 내에서는 거의 [[왕따]]수준이었다.] 사림이 실무 능력에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사림의 근본적인 사상부터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철학 ONLY 스타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주된 학문은 죄다 철학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정치학]], [[경제학]] 같은게 없었다. 물론 이 점은 서양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서양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은 논리학, 수사학, 문법, 음악, 산술, 기하학, 천문학, 신학, 법학, 의학이었다. 적어도 오직 성리학만 가르치던 조선보다는 실용적인 교육인 셈.] 즉 사림의 기본 성향 자체가 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게다가 실학파도 근본은 사림이라곤 하지만, 정작 그 실학파는 당대엔 사림 내에서 거의 '''왕따''' 수준이었다. 실학파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계가 다수였고. 실학자들의 근본이 사림이었으니 사림도 실무적인 성향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성향이 사림 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점이 사림의 성향이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사림들이 잡학이라고 신나게 까던 실용적 학문을 지향한 후대의 [[실학|실학자]]들도 당대의 고위급 인사들보다 현실 개혁쪽에 초점을 더 두었을 뿐, 근본적으로 성리학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리학이 태생적으로 현실지향적, 실용주의적 경향이 큰 학문인 만큼,[* 이 점은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초기 개국공신들이 [[성리학]]에 기반한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쪽이 되려 성리학의 본질로 되돌아간 셈이고, 사림파의 주류 세력이 이단에 더 가까운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조차도 보수파 세력으로 알려져있던 [[서인]]이나 그 후신 세력인 [[노론]]보다도 오히려 [[보수주의]] 성향이 더 강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류 [[역사학|역사학계]]의 평가가 날로 박해지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임오화변]]의 원인을 [[사도세자]]가 [[노론]]의 주류 세력과의 돈독한 유대로 인해 [[진보주의|진보]]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자, 이를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 [[영조]]가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노론 자체를 박살낼 목적으로 벌였다는 가설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꼭 이것만 가지고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짓을 벌인 건 아니겠지만, 노론과 함께 어울리면서 아들이 [[조선]] 사회의 기강을 흐트러놓는다고 생각한게,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한 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학|실학자]]들보다는 [[정몽주]], [[정도전]] 등의 [[여말선초]] 때의 성리학자들이 진짜 [[진보주의|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아예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사회에 완전히 도입되지 못한 [[토지 공개념]]에 기반해서 계민수전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혈통에 관계없는 공정한 인재 등용을 위해 [[과거 제도]]를 매우 중시하면서, 기득권 자체를 완전히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실학자들 중에서 정말로 진보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는 인물은 [[연암 박지원]]이나 담헌 [[홍대용]] 등 몇 사람 안 된다.]. 성종 시대의 문명적 퇴행에 대해서도 훈구파가 득세할 때라고 주장하였으나. 성종을 검색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건 즉위 초반의 일에 불과하고, 사림파가 득세하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성종 때라는걸 감안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변론이다. 성종 치세의 훈구파의 집권은 7년이지만 사림파는 그 나머지 기간인 18년으로 훈구파보다 2배 이상 집권했다. 특히 세조와 훈구의 트롤이 사림에게 누명으로 씌워졌다고 하는데 애초에 관학≠훈구다.[* 훈구는 기존의 관학파 중 대대로 고관대작을 이어오며 권세를 쌓은 기존 고위 사대부 층과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공신남발로 인해 새로이 권세를 얻은 세력이 합쳐져 이루어진 세력이다. 당연히 모든 관학파가 훈구였던 것은 아니다.] 훈구는 관학의 한 갈래였을 뿐 순수한 관학도 아니었다. 또한 훈구가 관학을 온전히 계승했고 아니고 여부를 떠나서 이는 완전히 논점을 흐리는 주장인 것이, 훈구의 공과(功過) 여부를 떠나서 결국 사림이 중점으로 삼던 기치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것이 결국 탁상공론과 이념싸움에 매진하는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훈구가 못했고 사림이 그걸 밀어냈으면 사림이 잘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으니 나라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다.''' 훈구의 일부가 관학을 망친 것은 사실이지만 관학이 망가진 토대 위에 선 사림이 그걸 완전히 땅 밑으로 묻어버린 걸 비판하는 것이지 조선의 모든 잘못이 온전히 사림만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사림의 문제는 사림의 학자들 개개인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사림이 추구하던 가치관 자체가 국가의 실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재능 있고 유능한 누군가가 사림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할 수는 있어도 사림 자체가 유능한 실무진을 계속 배출하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현대의 운동권 세력들이 세대를 막론하고 욕을 먹는 이유와 비슷하다. 운동권 역시 독재세력에 저항하면서 쌓은 논파력이나 철학적 지식은 뛰어나지만, 쌓은 지식이 그것뿐이라 막상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무적 지식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문제점을 '우리가 더 고등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더 우월하다.' 는 논리로 정신승리한다는 점에서 사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림이 한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가의 제도나 법에 관련된 것들은 트롤링도 많지만 성과도 지속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제도적인 부분은 그나마 괜찮은데 기술적이고 현장에 걸맞는 성과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당장 사림 집권 이후 실학파가 내놓은 것들을 제외하고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결과물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얼른 떠오르는 게 거의 없다. 결정적으로 세조 때 혁파된 총통위를 부활시켜야 할걸 끝내 하지 않아 조선의 군사력 보강에 영 도움이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도 무기나 기술 연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초에 조선은 기술적 연구가 정체된 나라지 인구가 적거나 군대가 없었던 나라도 아니고, 의병들이 기술적인 우위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다.[* 의병의 승리 역시도 대부분 소규모 전투가 대다수지 대규모 전투는 관군, 명나라군과의 협동없이는 별로 기를 펴지 못했다. 물론 이는 국가적 조직인 관군, 명나라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은 의병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나선정벌 등에서 활약한 것도 조선군의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당시 국왕이었던 효종이 훌륭한 사수를 육성하여 사수의 실력에 기인한 바가 컸다. 게다가 나선정벌 활약의 계기가 된 북벌론은 평소부터 해오던 훈련이 아니라 청나라에게 복수하자는 명분으로 일어난 일시적인 활동이었다.[* 물론 현대의 평가는 실제로 청나라에게 복수하기보단 이걸 명분으로 조선의 군사적 제도를 정비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조선 전반에 걸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상황과 명분에 따라 촉발된 것이지 사림이 군대와 기술을 육성하는 데에 앞장선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고 사림이 세도정치를 직접적으로 유발하진 않았지만 결국 세도정치의 간접적인 계기가 된 건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는 세도정치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게 개판이 된 붕당을 누르려는 영조의 탕평이었고 시초라 할 수 있는 건 정조 대의 홍국영이었다. 그리고 정조 사후 당대의 문제점들이 꼬이고 꼬여 결국 세도정치가 터진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전까지 개판이 되었던 붕당을 영조와 정조가 자신들의 카리스마와 강력한 왕권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 때부터 기미를 보이던 외척 중심의 척신 정치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친 감이 많지만 붕당은 어찌되었든 특정 집단의 정치적 독점을 막는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갈수록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폐쇄화, 극단화되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에 염증을 느낀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붕당을 조지는 과정에서 근왕세력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 두 왕의 눈에 든 것이 풍산 홍씨와 안동 김씨라는 외척이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마저 죽자, 그동안 왕권 강화라는 명분으로 권력이 비대해진 외척세력을 막을 수 있는 집단이 하나도 없었고, 이후에 김조순에 의해 벽파가 숙청되며 붕당이 사실상 소멸하자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물론 이에 앞서 숙종의 환국과 숙종 말년에 노론을 밀어준 것이 영조의 탕평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환국 자체가 그놈의 개판 붕당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다만 숙종이 환국을 시행한 것 자체는 정치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본인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붕당이 개판이라서 숙종이 그걸 정상화시켰다는 게 아니고, 왕이 나서서 손을 볼 때까지 개판이 정리가 안 되던 붕당 자체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문제는 숙종의 성격이 워낙에 지랄맞았다는 것. 자기 딴에는 개판이었던 붕당을 손보겠답시고 환국을 시행했으나, 그 과정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이라는 두 여인이 죽어나가고 수많은 서인과 남인들이 쓸려나갈 정도로 피바다였기에, 붕당이 개판이 된 원인 중 하나인 서로에 대한 증오를 오히려 증폭시키고 말았다. 송시열-윤휴 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여길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그의 능력만은 높이 평가해 윤휴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조때가 되면 소론 영수 이광좌에 대해서 노론가에선 아이들도 광이나 광좌라 부르는 꼴이다. 여기에 상대 당을 역당(역적의 당), 상대 당의 인물들을 소인으로 낙인찍어 비하하는건 덤.] 거기다 세도정치 시기에도 어디까지는 중앙권력에서 사림이 안동김씨에 밀려난 거지 지방권력까지 밀려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이들은 세도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으면 그들의 대리인인 수령과 아전이랑 같이 농민들을 수탈하였고 그 중 서원을 중심으로 지역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에 민란이 빈번해지는 원흉이 되었으며, 대원군이 47개를 제외한 7백개 서원 전부 폐쇄하는 강경책을 내놓게 된다. 또한 5백년 넘게 군역에 면제된 양반층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가 실시되자 전국의 사림들은 반발하며 한양으로 집결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할수 없다는 의지와[* 이때 호포제를 반대한 명분은 "선비들에도 세금을 거두면 반상의 구별이 어렵다"는 궤변이었다. 당시 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할 때 선비라 할만한 이들은 2010년대에 생긴 단어를 빌려 씹선비라 불러야 할 정도로 부패하고 자질이 없었으며(세도정치기 세도가에 맞서긴 커녕 세도가 문전이나 기웃대거나 아부하던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이항로와 그 제자들은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을 닦아 명분상 꿀릴건 없었다만.) 세금 문제도 원래 세금은 양인(양반 포함)은 다 내는것이다. 효종 때 호포제 실시 논의가 있었을때 반대파들은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건 사대부들인데 그들에게 세금 거두라 하면 원망이 크지 않을까요?"처럼 궁색하긴 하지만 대원군 때처럼 뻔뻔한 주장은 하지 않았다.] 서원 철폐 취소를 요구한 적도 있다. 게다가 사대부들이 중시했던 [[재조지은]]의 경우 명나라에서는 왜란 이후 이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에게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는데 이는 만력제의 잘못으로 명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만력제는 자신의 국고를 여는 대신 광세라고 하여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은을 긁어모았으며 불똥이 조선으로도 튀어 조선에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다. '''즉 명나라와 만력제는 정작 조선 입장에서도 마냥 고마운 존재는 아니었음에도 조선은 일부 사례들을 제외하면 명나라와 만력제를 재조지은이라며 칭송했던 것이다.'''출처:[[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2409635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