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림파 (문단 편집) === 2000년대 이후의 학설 === >국사교과서에서 사림이라는 개념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낙향한 온건개혁파 사대부의 제자 혹은 그 후예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리학 사상에 전념하며 향촌 자치를 추구하다가 성종 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이다. 그리고 조정에 진출한 지방 출신 사림들은 언론 삼사에 포진해 훈구세력과 대립하며 국왕권 강화에 일조했다고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이같이 명확한 개념 정의에 비해, 실록에서 등장하는 사림이라는 용어는 다소 모호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서 설명처럼 고려 말 온건개혁파의 후예로서 중앙정계에 등장한 일군의 개혁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다.[[https://theme.archives.go.kr/next/sillok/sub3.do|#]]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도학정치를 주장하는 관료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유교적 이상 못지않게, 지배층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기존 연구에서 사림의 사회적 성격을 경제적, 혈통적 공통성을 이용해서 파악하고자 한 바 있으나, 사림을 단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도덕정치를 실천하는 ‘운동집단’이나 학문 네트워크로 보는 관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79623/1/11-%EB%B0%B1%EA%B4%91%EC%97%B4.pdf|#]] 위의 기존의 학계 통설과 다른 시각을 내놓은 것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및 한국학 교수 에드워드 윌렛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r)[* 1924~2001,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의 시조격으로 불리며 자료 수집과 분석 등에서 한국사 연구 방법에 발전을 가져다 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로 그는 자신의 연구에서 '''훈구와 사림의 사회 경제적 배경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림의 성격에서 훈구와 사림의 차이는 정치적 이념 정도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문화유씨가정보]]와 같은 족보 분석, 토지 소유 등을 연구한 결과 등을 통해 훈구와 사림으로 대표되던 기존 세력이 사실 혈족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경제적으로도 기반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며 기존의 훈구-사림 대립 논쟁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05|##]] 훈구파의 존재 자체가 학계에서 사림과 대비되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 상황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사림의 등장은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불안정했던 왕위 교체로 인해 왕권의 위상과 정통성이 추락하면서 언로 역할을 담당하던 [[삼사(조선)|삼사]] [[대간#臺諫]]직의 위상이 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론이라는 이름으로 사대부들의 여론이 결집이 되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훈척 또한 이러한 불안정한 왕위 교체기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한 척신으로 대표되는 왕의 측근세력이었고[* 이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왕이 [[중종]]으로 측근세력이 반정공신->[[조광조]]->[[남곤]]->[[김안로]]->[[윤임]]과 [[윤원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듯 척신은 훈구와 사림을 가리지 않았다.] 사림은 이 과정에서 대간에게 집중되던 언론 기능이 지역 유생들까지도 상소를 올리며 언로가 확되되면서 정체성이 확장되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