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림파 (문단 편집) === 사림 등장 전 === [[조선민족]]에 유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중국의 문물을 들여 올 때, 불교, 도교와 함께 함께 수용했다. 다만 삼국시대에는 유교는 오직 지배층만의 학문이었고, 유불선 중에 한민족 내에서 가장 먼저 수용되고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불교]]였기에 불교에 밀려서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래도 삼국 중에서는 [[신라]]가 유교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시기에 [[불교]]를 견재하기 위하여 [[도교]]를 선택했었고, 백제는 불교신앙이 강해서 다른 신앙은 유지되지 못했다.] 이후,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자, 신라의 [[한반도]]에서 유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왕실]]은 [[진골|진골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독서삼품과]]을 시행하려고 하는 등, 왕권을 키우는데 유교를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6두품]]들은 진골귀족들에 의한 차별을 자신들의 학식수준을 높여서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신라에게 강대국 [[당나라]]의 선진제도인 [[과거제]]라는 좋은 본보기가 있었음으로 그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 전역에서는 아직도 불교의 세가 강했고, 신라불교의 중심축이었던 [[교종]]이 신라귀족들 편을 들었으므로 왕실의 노력과 6두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신라말에 6두품도 [[유교]]가 아닌 불교의 [[선종]]을 중심으로 자신의 세를 불렸으며, 유교는 자신을 수양하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6두품과 호족들에 의하여 유교가 [[조선민족]]에 널리 퍼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선종 불교를 중심으로 세를 키운 호족들 중에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이 한반도를 재통일하고 고려를 세웠다. 고려가 세워진 이후, 고려의 왕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를 계속 들여오려고 했다. 고려 초중기에 유교를 들여와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대표적인 왕에는 [[광종]]과 [[성종]]이 있는데, 특히 광종은 [[쌍기]]를 받아들여서 우리민족사에 [[과거제]]를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문제는 고려의 [[유학자]]들이 상당히 [[사대주의]]적이고 매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했다는 것이고, 유교로 인하여 왕권은 안정화되었지만 유교가 강해질수록 고려의 [[상무정신]]은 파괴되어 갔다. 삼국 중에 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신라]]의 영향으로, 고려 초중기 유학자들 다수가 옛 신라의 지역[* 대부분은 [[경상도]]지역]에서 유래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유학자들이 강해질수록 신라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조선민족의 유학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신정권]]시기다. 무신정권의 원인이 되었던 [[문벌귀족]]들은 국교인 교종 [[불교]]를 믿으면서 대토지와 [[음서]]로 권력을 유지했는데, 문벌귀족을 박살내고 집권한 무신들 입장에서는 이게 참으로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무신정권은 문벌귀족의 힘을 줄이기 위하여, [[교종]]을 탄압하고 [[선종]]을 우대하는 한편,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 유학자들을 등용한다. 그리고 [[송나라]]에서 [[성리학]]이 생기고 이 성리학을 고려의 유학자들이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사림이 생겨날 토대가 분명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대몽항쟁|대몽항쟁기]]에서 고려가 지고 [[무신정권]] 또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붕괴했지만, 무신정권기에 급속히 성장한 [[불교]]의 선종과 [[유교]]의 [[성리학자|성리학자들]]은 고려말, [[공민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함께 계속 발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