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림파 (문단 편집) === 조선 말 / 구한 말 === 결국 노론의 일당 전제화와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같은 세도가문이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과두정에 가까운 꼴로 정치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에 경도되어서 다른 학문을 박해하였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교조화된 성리학을 국시로 국가로 통치하였다. 결국 조선은 성리학 교조주의로 인하여 건전한 학풍을 전부 상실했으며, 세종대왕 때의 지식과 기술을 복원하지 못해서 인구가 늘어나는데도 세종대왕 시기의 세금수입의 절반도 안되는 재정[* 인구가 약 900만이었던 세종대왕 시기의 국가수입은 140만 결이었고, 인구가 1800만 명이었던 고종황제시기의 국가수입은 90만결이었다. 심지어 세종대왕은 착취해서 얻어낸 성과가 아니고 고종황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삼정의 문란]] 등을 해결 한 뒤에도 저 수치인 것이다. 인구는 약 2배 늘어났는데, 세수는 반토막이 난 것을 보면 사림이 얼마나 나라를 망쳤는지 알 수 있다.]으로 나라를 운영해야 했다.[* 세종대왕 시기에는 수학과 과학이 발전했기에 '''고등수학'''을 할 수 있었다. ] 사림들은 정치와 경제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들의 상국이라는 [[청나라]]의 전체규모와 성(省)하나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어린 고종이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모아놓고 청나라에 대하여 질문했는데, 조선의 재상들임에도 대답을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남인들을 등용하여 잠시 옛 기술과 과학을 잠시 사용하여, [[면제배갑]]을 발명하거나 실험형 증기선을 만들어 보기도 했었으나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이들을 다시 쫓아냈고 개화파가 자리잡을 때가지 사림 특유의 성리학 교조주의에 의한 기술적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대한제국]]이 성립할 쯤이 돼서야, 조선 조정도 [[성리학]]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었고, 조선이 성리학국가에서 탈피하자 사림들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중종 대 이후, 우리나라 모든 유림들은 사림에서 나왔으므로 현재 존속한 유림들도 사림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