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림파 (문단 편집) === 옹호 === 일단 고려 말의 공적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림들은 부패한 당시의 불교와 권문세족을 박살내는데 명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관학파와 시림파들은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한 배를 탄 같은 성리학자들이었다.] 지금 시점에서야 우리가 물려받은 성리학은 교조화된 성리학에 불과하기 때문에 욕을 하지만 조선을 완전한 중앙집권화 시키는 명분을 제공한 것도 성리학자들이었고, 조선의 중앙집권제를 만들고 유지한 것도 성리학자들이었다. 이는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사라질 때까지 유효하게 기능했다. 실제로 [[유럽]]에서 조차도 시험을 처서 [[관료제]]를 만들고 유지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시기에 공정한 시험으로 관료를 뽑은 것도 성리학자들이 한 것이다. 성리학자들 덕분에 능력주의 학풍이 정착해서 [[음서제]]가 사장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림파가 [[관학파]]와 [[훈구파]]에 비하여, 상당히 원리주의자들로 불리긴 하지만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성리학이란 학문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물론 성리학 자체가 [[송나라]] 때 만들어진 학문이고 이미 송나라 말이면 문제점이 들어나서 [[원나라]]시기만 해도 중국 유교의 중심은 [[양명학]]이 대세가 되었지만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이야기이고 나라를 통치하는데에는 [[성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실 고려 말에 불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원리주의적인 모습이 필요하기도 했고 지방의 유력자들을 누르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성리학은 융통성을 부리면 안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 [[관학파]]가 [[단종]] 충성파와 [[세조]]의 [[훈구파]]로 나뉘어 싸우면서 자신들의 숫자를 줄여 버리는 바람에 조선 조정에 인재가 부족했기에 사림파가 조정에 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사림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던 시점은 단종을 몰아낸 [[훈구파]]가 방납의 권리(防納)를 얻고 이를 악용하는 등의 문제를 만들던 시점이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분명 꺼림직하지만 성리학으로 만들어진 유교국가인 이상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것도 성리학자들 뿐인데, 당시 훈구파 대신들을 견제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림파 뿐이었다. 실제로 사림은 훈구파에 대한 견재를 확실히 하여, 훈구파의 독주를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그 예시 중, 하나가 사림이 주장한 수미법(收米法)인데, 수미법으로 점점 사유지를 넓혀 대지주(大地主)로 커가는 관학파에게 제동을 걸었던 것은 큰 공적이다. 우리가 성리학의 부정적인 것만 물려받았다고 이미 서술했는데, 이 부정적인 것들은 전부 [[인조]]와 [[병자호란]] 패전 후의 [[서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이슬람]]의 교리 중 일부를 안좋은 시각으로 보고 특정 [[무슬림]] 집단들에 대한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지만, [[제국주의]]시대 전, 그들이 유럽제국들에게 침략받고 착취당하기 전에는 매우 융통성있는 종교였었듯이 인조 이전의 성리학은 고려시대의 성 평등적 요소 등을 인정했다. 그 예시로 '''율곡 [[이이(조선)|이이]] 남매 분재기'''를 꼽을 수 있는데[* 율곡 이이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이의 7남매가 모여 유산을 분배하며 작성한 문서. 알다시피 이이는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태두(泰斗)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학자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성리학이 당시부터 굳은 학문이었다면, 그런 집안에서 이런 사료(史料)가 나오리라 생각하긴 힘들다.[* 또한 이이의 경우는 [[신사임당]] 문서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덕수 이씨 가문 자체가 원래부터 여자들의 힘이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신사임당의 영향으로 한때 승려가 된 적도 있는 인물이다. 불경공부 열심히 한 결과 성리학을 심성학으로 변천시키기도 했지만.]], 이러한 자료를 확인해 본다면 우리가 성리학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조선 전기에도 성리학이 근본주의가 있었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림 초창기의 성리학자인 [[채수]]의 경우를 보면 초기라도 반드시 융통성이 있던건 아니다.] 믈론 [[조광조]]같이 청렴결백과 이상정치를 주장하면서도 자신들'''만''' 옳다는 생각에 빠져 다른 세력이나 학풍을 전무 무시하던 이중적인 근본주의자도 있긴 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는게 일단 조선사의 대부분은 이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이들이 만악의 근원이라 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만약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리자면 반대로 모든 공도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심지어 세도정치도 이들 탓이라 하는데 세도정치의 근본적 원인은 외척 세력의 강화인데 기실 이는 사림세력 이전의 문제다. 오히려 외척 세력이 힘을 얻는 과정에서 환국정치 등으로 많은 관료들이 죽어나갔으며 붕당이 무너져내린 결과 외척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즉 세도정치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왕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사림파의 문제로 몰아간다면 사림파가 들어서기 이전에 한명회 등이 외척으로 세도를 부린 것은 무엇이 되는가? 그리고 실무 능력을 탓하는 것도 물론 훈구를 견제하기 위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재들을 등용한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으나 만약 이들이 정말 실무 능력이 없었다면 임진왜란때 류성룡같은 이들의 활약이 일어날 리가 만무했을 터이다. 심지어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몰아갔던 윤휴의 경우 그의 반대파이던 서인과 사문난적이라 지목한 송시열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등용되었다. 당초에 국력을 대폭으로 손실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을 다시 재건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과연 저 비판대로 실무 능력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 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거꾸로 훈구파가 실무 능력 있는 인사들만 썼느냐 하면 그것도 문제인 게 이들 중에는 단종에게서 왕권을 빼앗는 패륜에 가담한 공신들이 들어가 있으며 이들이 모두 관료 출신이라 하기 힘들다.[* 조광조의 문제점 중 하나가 천민 출신이던 공신을 주로 죽게 만들었단 부분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천민이라고 모두 무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관료 능력이 있어서 관직에 오른 것인가? 천민 등 사림들에게 있어서는 기피되는 신분 출신들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 외에 다른 출세수단이 있었는데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특히 세조, 중종 때는 엄청난 공신을 제조했고 그러니 사림들 입장에서는 신분은 미천한데 벼락출세한 인물들이 나올 수가 있던 거다. 문제는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출세한 이들이 과연 실력도 검증되었는지 의문이라는 것. 더 처참한 건 세조, 중종은 원종공신까지 합쳐 수천 명이나 책봉했는데 그들 상당수는 공도 없는데 책봉된 이들이 대다수다.] 심지어 이들은 그런 패륜 과정에서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되려 학문적으로도 검증이 안된 인물을 공신이란 이유로 편익을 봐주는 훈구파쪽도 낙하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당초에 나라에서 정한 과거제를 통해서 관료가 되고 그 관료가 된 이후에도 능력이나 학연을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와 패륜에 가담한 연줄을 통해 관직에 오르는 것 둘중 어느 쪽이 낙하산인가? 얼자 출신이라 차별 받았다는 유자광이나 남이의 경우를 보더라도 왕의 총애를 받아 광속으로 승진하는 등 낙하산 문제는 훈구쪽이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다 볼 수가 없었다. 잡학 부분에 대해서도 김종직이 그런 발언을 했었다곤 하나[* 심지어 김종직은 후대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 이후 조선이 정말로 무기 개발에 게을렀던가?[* 임진왜란 때의 졸전 행보를 보인 선조 역시도 무기 개발에는 뒷전인 왕이 아니라서 이순신이 그렇게나 잘 써먹은 천자총통은 바로 선조 때 개발되었고 일본군에게 털린 인상만 깊어서 그렇지 북방 여진족과의 분쟁에서는 나름 잘 대처했다.] 되려 임진왜란 때 많은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켜서 직접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패배도 많았지만 승리도 하였다. 북벌같은 명분으로 무기 연구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이는 [[나선정벌]] 등에서 활약한 것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엄 등은 일본에서 고구마 같은 작물을 들여오기도 했으며 잡학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파라 불리는 이들도 근본은 사림이다. 거꾸로 비교 대상인 관학파와 훈구파를 보면 우선 관학파가 주류이던 세종 때엔 반박할 여지 없이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였으나 세조 때에 들어서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한 시점에서 관학이 쇠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는데, 애초에 중화식 관료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송나라 이후 관학은 줄곧 쇠퇴 일변도였다. 애초에 관학은 국초에 매우 짧은 기간에만 유지될 뿐, 장기간 유지되었던 적 자체가 없던 것이다. 애초에 정치집단으로 자생적인 생명력이 없던 집단이 관학파이다. 역사적 사례를 참고할 때, 관학의 쇠퇴는 필연일 뿐이다. 참고로 세종 시절이라고 관학파가 멀쩡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세종의 하드캐리였을 뿐, 이 시기도 만만치않게 썩어돌아가던 시절이다. 황희 집안의 비리 하나를 덮어주기 위해서 관학파 중진이 총출동하여 세종 vs 관학파 올스타 전 빅매치를 치룬 것만 봐도... 집현전의 연구기관으로서의 능력도 세종 후기로가면 시들해지고, 세종 사후 문종 와병이 시작되자, 이들은 정치적 적대세력인 고명대신을 쳐낸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에 적극, 소극적으로 협조까지 했었다...] 이후 홍문관 등으로 부분적으로 집현전의 역할을 부활시켰으나 완전한 부활은 아니었으며 이로인해 세조 이전 때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 연구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세조와 그의 공신들인 훈구파가 저지른 행적때문에 누명을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훈구파에서 잡학의 재능이 있는 인물이 있던 건 이들 중 일부가 관학파 출신인 것도 있으나 이 이후 선조에 이르기까지 잡학의 발전이 더뎌졌다 본다면 그때까지 남은 훈구파는 뭘 했던 건가? 심지어 총통위를 해체시킨건 세조 때다.[* 다만 총통위의 해체와 화기 기술개발의 정체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입증되기 힘들다. 총통위는 그 자체로서 화기를 연구하는 기구가 아닌, 화기의 운용과 일선 부대에 보급, 훈련을 담당하는 특수기구였고, 이들이 해체된 이유는 그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인지라... 일단, 세조 이후 화기 개발에 있어 이전과 같은 적극성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다. 다만 그 이유가 세조와 훈구파의 협소한 전략안 때문이 아닌, 당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그 이상의 화기를 개발하는 것은 비용 낭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이만주를 척살한 이후 대규모 정규전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군비라도 남아돌면 모르겠지만 조선의 군비는 이미 세종 시절부터 고갈된 상황이었다...] 즉 훈구파는 과학과 같은 분야를 권장하긴커녕 이들로 인해 이전 관학파의 다양한 학문이 손실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단, 훈구파의 정의부터도 애매한데다 엄밀히 말해 세조의 독단에 의한 행위이니 훈구로 분류된 인물들이 어떤 성격이었다고 정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세도정치 때를 사림 집권시기라 할 수나 있는가도 문제이다. 물론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인 김조순은 분명 사림이었으며 안동 김씨 일파들도 모두가 무능력자는 아니었고 개중엔 능력있는 인물도 있었다곤 하지만 당시에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이로인해 나라가 피폐해진 것을 생각하면 이는 사림 이전에 국가 시스템 붕괴의 문제이다. 특히나 이 세도 정치를 불러온 것이 붕당이 아닌 왕권 강화의 부작용이란 걸 생각하면 이것마저도 사림에게 문제를 전가하는 건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심지어 훈구파가 득세할 때조차도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을 이용해 세도를 누리려는 시도까지 했었다.[* 반대로 세조같은 인물의 독단으로 만들어진 폐해와 공신들이 지나치게 큰 권위를 가져 만든 실책들을 훈구파로 분류되는 모든 인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명과의 사대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부분인데 우선 조선 입장에선 명에게 반항할만한 국력은 없었다.[* 삼국시대처럼 중국이 남북으로 혹은 소규모 국가들이 자웅을 겨루던 시대라면 모를까 이 당시는 그런건 택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큰 상황이었으며 이들에게 사대하는 것은 조선 입장에서 큰 손해도 아니었다. 이는 명청 교체기도 마찬가지였으며 청이 완전히 명을 이기리란 보장도 없던 상황에서 청의 편을 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립을 취하자니 양쪽 모두에게도 좋지 않은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은 그런 불안정한 요소를 없애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고 이로인해 굴욕을 당한 조선 입장에서 청이 곱게 보일 리가 만무했으며 임란 등으로 빛을 진 명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명, 청 양국에게 조그마한 빌미를 주더라도 이는 조선에 대한 압박에서 심하면 침공까지 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건 결과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다. 또한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 없는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서 그렇다고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명나라를 진심으로 섬겼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pa_12208023_002|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8월 23일 무인 2번째기사]]] 신분 관련해서도 과부의 재가를 금지시킨 장본인은 성종이였으며 이는 그 훈구파들 조차 반대하던 것을 오직 성종 개인의 의지만으로 강행한 사례다.[* 교육과정에서는 훈구와 성종이 대립한 것처럼 가르치지만,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훈구는 기본적으로 근왕세력이었다. 그런 이들도 과부개가금지법의 실익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반대했던 것이다..] 심지어 서얼 출신의 등용에 제한을 둔것도 경국대전에 실린 내용이며 장영실과 같은 사례를 생각하면 신분에 따른 차별은 사림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어온 문제였다. 되려 학문을 갖췄음에도 노비란 신분 때문에 능력을 발휘 못하는 것을 슬퍼하는 사례들도 훈구파가 사라진 이후의 이야기다. 물론 이를 통해 사림이 신분제에 부정적이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이 없거나 이러한 천민에 대한 차별을 강화시키만 해왔다고 하기엔 문제가 있단 걸 보여준다. 당초에 이 부분은 천민이란 존재를 남겨둔 조선의 신분제의 한계라고 밖에 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정도전은 천민도 없애야 한다는 개혁안을 가지고 있었었다.] 서얼 관련해서도 서얼이 첩의 자식이란 걸 생각하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서얼을 차별하지 않게 되면 처와 첩의 차이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이는 결혼 문화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서얼 차별에 대해서도 사실 유자광을 제외하면 훈구파에서도 특별하게 언급될만큼 능력있는 서얼에 대한 배려같은 건 등장하지도 않고 유자광마저도 훈구 내에서 지지를 얻어 올라간 게 아니라 왕의 총애가 큰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 관학파는 세조 직전까지, 훈구파는 성종 때부터 밀려나서 선조 때에나 사라지는데 사림 세력은 성종 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해서 끝까지 갔다. 즉, 이들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는건 그만큼 이들이 오랫동안 조선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며 이는 거꾸로 조선이 그만큼 유지되고 발전해온 것 또한 이들의 공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사림파는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 사림이란 한 단어로 묶을 수 있을만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그들 내부에서도 다양한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훈구와의 비교를 위해 하나로 묶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이는 훈구파 또한 마찬가지인데 하다못해 고려의 학자로부터 이어진 학연에서 갈라진 사림과 달리 이쪽은 명백히 묶일만한 기준이 사림파와의 갈등 외엔 없다.] 어떻게 보면 이런 논리는 [[노론 음모론]]과 약간 이어지기도 한다. 조선의 정치 모습을 비난하면서 처음에는 [[노론]]을 비난하다가 서인, 붕당으로 점점 비난하는 범위가 넓어지더니 이젠 사림파 전체로 확대되는 것. 그리고 군사력의 경우,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 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 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했을 정도로 처참했다. 출처:[[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척계광]]이 [[원앙진]] 전법을 개발하면서 해결되었다는 반론이 있지만 척계광은 왜구에 특화된 전술을 이용해 척가군이라는 정예병을 양성했을뿐 당시 명나라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명나라도 조선처럼 군인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으며[* 이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이 [[웅정필]]과 [[원숭환]]이다.]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토목보의 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또한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비록 [[토목보의 변]]이후 [[영락제]] 시절에 비해서는 국가위상이 낮아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오늘날 미국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 당시 명나라군은 1만명당 128명의 여진족을 죽였다.],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 [* 출처:[[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404009_001|#]][*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조선)]]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