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소 (문단 편집) === 진왕 책봉과 [[죽음]] === 그 후 조환은 3월 기묘일, 사마소가 촉정을 위해 장안에 있다가 낙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마소의 작위를 왕으로 올리고 이전의 봉토를 합해 20군으로 증봉하였다. 여름 5월 계미일 천자는 무양선문후를 진선왕으로 무양충무후를 진경왕으로 올렸으며 이후 중무군 신창향후 [[사마염]]을 진나라의 세자로 봉했다.[* 천자가 봉하거나 시호를 올린 형식을 취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마소가 주도하였다.] 본디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가충의 반대로 장남인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목했던 것. 이후 사마소는 12개의 끈이 있는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깃발을 세우며 출입할 때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금근거를 타며 6마리의 말을 묶고 오시부거를 갖추어 쓰고 모두와 운한을 설치하며 팔일무를 악무로 쓰고 악대는 종을 4열로 늘어놓고 쓸 수 있으며 지위를 연왕보다 높게 하였다. 왕비를 왕후로 높이고 세자를 태자로 높이며 왕녀, 왕손의 작호를 전부 황제의 예법과 동일하게 하였다. 궁중의 금기중에 번잡하고 세세한 것들과 법식 중에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은 모두 사마소가 주청을 올려 없앴다. 진나라에 어사대부, 시중, 상시, 상서, 중령군, 위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년 가을 8월 신묘일에 [[뇌졸중|중풍]]으로 쓰러져 노침에서 죽으니, 당시 나이가 54세였다. 9월 계유일 숭양릉에 장사지내고[* 태흥 2년(319년), 북쪽의 전조 황제 유요에게 무덤이 도굴당할 뻔했으나 종손 사마예(동진의 초대 황제)의 간곡한 부탁으로 간신히 도굴을 면했다.] 시호를 문왕이라 하였다. 이후 아들인 사마염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묘호와 존호를 더해 사마소를 태조 문황제로 추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