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예 (문단 편집) == 평가 == >'''"사마씨 가문의 양심은 두 말인데, 사마예가 한 석을 독점하고, 그 나머지 여덟말은 (다른 사마씨들이 사마예에게) 함께 빚진 것이다."''' >(司马家良心两斗,乂独占一石,其余共欠八斗。) >---- >중국의 팔왕의 난 관련 민간풍문.[[https://zh.moegirl.org.cn/%E5%85%A8%E9%9D%A2%E6%88%98%E4%BA%89%EF%BC%9A%E4%B8%89%E5%9B%BD/%E6%B4%BE%E7%B3%BB#cite_ref-5|#]][*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를 설명하는 글의 댓글에서는 '사마씨는 모두 똥같은 놈들이야'(司马家就是一坨屎啊。)라는 말에 어떤 사람이 '사마 가문의 양심은 여덟말인데, 사마예, [[사마위]] 두 형제가 한 석을 독점하고, 그 나머지 제왕들이 두 말을 빌렸다'(司马家良心八斗,司马乂司马玮哥俩独占一石,其余诸王共欠两斗。)고 대답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바리에이션이 꽤 있는 드립으로 보인다.[[https://zhuanlan.zhihu.com/p/78273503|출처]]] 자신의 형인 혜제를 충실히 보필하고 다른 왕들과 협치를 하여 엉망이 된 제국의 체제를 재정비하고 지방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서진 사마씨 황실의 마지막 준걸이다.''' 사마예는 팔왕의 난에서 권력을 잡았던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백치였던 혜제를 존중하고 다른 왕들[* 특히 이복동생이자 명망이 높았던 성도왕 사마영.]과 협치를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하간왕 사마옹의 농간에 놀아난 사마영의 폭주로 비극을 맞게 되었지만 혜제는 기본적으로 동생 사마예를 충신으로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진서 역시 '장사왕(사마예)은 재주가 뛰어나고 충성과 절개가 있었으며 열사의 기풍을 떨쳤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남긴 절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볼만하였다'라는 식으로 높게 평가했다. 장방의 부하들까지도 눈물을 흘린 데는 이 사람의 죽음이 잔인했던 것 뿐 아니라 나름대로 덕망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동생 사마영의 통수만 없었더라도, 하다못해 사마월의 분탕질만 없었더라도 서진을 중흥시킬만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팔왕의 난의 비극성을 더해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호]]가 《일주서》 〈시법해〉에 따르면 '사납고 교만하여 친한 이가 없음', '무고한 이를 죽임'의 뜻인 려([[厲]])인데, 이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이들에게 주어지는 악시이다. 아마도 사마경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이들이 죽은 것이나 사마경의 일족을 숙청한 일화, 사마영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낙양]]의 민생이 도탄에 빠진것을 감안한 시호로 보인다. 사실 사마예가 죽은 후 바로 사마예랑 대적하던 사마영이 정권을 잡았기에 악시가 내려진 것일수도 있고, 이후로도 시호를 고치기엔 다들 정신 없었어서 시호가 고쳐지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사마예의 아들들도 [[영가의 난]] 때 낙양이 함락되면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시호를 선시로 추숭해달라는 후손들도 없긴 했을 것이고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