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월 (문단 편집) === [[영가의 난]] === 정권을 잡은 사마월은 307년 1월 2일에 대사면령을 발표하고 연호를 영가로 고쳤다. 이때 이부랑 주목[* 사마월의 고모의 아들이다.]이 자신의 매부인 어사중승 제갈매와 더불어 사마월에게 건의했다. >주상이 처음에 황태제가 되었던 것은 장방의 뜻이었습니다. 청하왕(사마담)이 본래 태자이니 공께서는 의당 그를 세우셔야 합니다. 사마월은 이를 듣지 않았고 두 사람이 재차 권하자 화가 나 그들의 목을 베었다. 그 후 2월에 [[왕미(전조)|왕미]]가 청주, 서주를 노략질하고 스스로 정동대장군이라 하면서 2천석의 봉급을 받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에 사마월이 공령거 국선을 동래군 태수로 삼아 왕미를 토벌하게 했지만 왕미가 그를 공격해 죽였다. 그 후 황제가 굵직한 정치적인 일을 살펴보고 보통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자, 사마월은 이를 기뻐하지 않고 번부로 나가기를 굳게 청해 승낙을 얻어낸 뒤 허창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사를 주관했다. 307년 5월, 사마영의 옛 부하 급상[* 사마영의 관을 꺼내 수레에 싣고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를 아뢰었다고 한다.]이 갈족의 영수 [[석륵]]에게 투항한 뒤 위군 태수 풍숭을 격파하고 업성을 공략했다. 당시 업성을 지키고 있던 사마월의 동생 사마등은 업성이 공략되자 도망치다가 급상의 장수 이풍에게 살해되었다. 업성은 곧 불길이 치솟아 열흘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고 병사와 민간인 1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사마월은 이를 크게 두려워하며 [[구희(서진)|구희]]와 왕찬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석륵과 구희는 평원, 양평 사이에서 몇 달동안 대치하며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승패를 주고받았다. 사마월은 그를 돕고자 7월에 관도에 주둔하면서 낭야왕 사마예를 안동장군 겸 도독양주강남제군사로 삼아 건업에 주둔하게 했다. 그해 8월, 구희가 급상을 쳐서 동무양에서 대파하자, 급상은 물러나 청연으로 후퇴했다. 구희는 급상을 추격해 그의 여덟 개 보루를 격파하고 1만 명을 살해했고, 급상과 석륵은 한나라 영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12월 2일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던 유민 전견, 전란, 박성 등이 무리를 모아 사마등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며 급상을 공격해 낙릉에서 죽이고 사마영의 관을 우물에 버렸다.[* 사마영의 관은 후에 사마영의 옛 신하들이 거두어 장사지냈다.] 그러던 중 전 북군중후 여응, 탁지 교위 진안 등이 사마담을 태자로 삼을 것을 모의한 일이 있었다. 사마월은 이 일을 알게 되자 그들을 주살하고 사마담을 금용성에 가두었다. 또한 의형제 사이였으며 이번에 적을 대파한 공을 세운 구희를 정동 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고 도독청주제군사를 덧붙이며 청주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는 공을 보상해준 것이었지만 실상은 그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외지로 보낸 것으로, 본래 구희는 연주를 맡았으나 "연주는 요충지이고 위무제(조조)가 여기서 창업을 했는데 구희같이 순수한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곳에 오래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도 반도의 간언을 받아들여 청주로 보낸 것이다. 구희는 이때부터 사마월과 틈이 생겨 그를 모해할 마음을 품었다. 그는 청주에 이르자 엄격하고 각박하게 하면서 매일 사람의 목을 베니 청주사람들은 그를 '사람백정 자사'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도구 태수 위식이 무리 5~6만 명을 일으켜 연주 지역을 크게 노략질하자, 구희는 무염에서 이들을 토벌하고 연주를 사실상 장악했다. 308년 2월, 사마월은 사람들이 자꾸만 황태자로 추대하려 했던 사마담을 죽였다. 이후 그는 3월에 허창에서 견성으로 이동했고 왕미가 수만 명을 일으켜 청주, 서주, 연주, 예주 네주를 공략해 구희를 격파하고 4월에 허창으로 들어오자 사마 왕빈을 파견해 갑사 5천 명을 인솔하여 낙양을 호위하게 했다. 이후 7월에 흉노족이 세운 한나라 군대가 평양을 공략하고 하북 일대를 석권하려 들자, 사마월은 8월에 견성에서 복성으로 옮겼다가 얼마안가 형양으로 이동해 이들을 막을 방안을 모색했다. 308년 9월, 한의 왕미, 석륵이 업성을 침략하자 화욱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사마월은 예주 자사 배헌에게 조서를 내려 백마에 주둔해 왕미를 막게 하고, 거기장군 왕감에게 동연에 주둔하여 석륵을 막게 했으며, 평북장군 조무에게 대양에 주둔해 한나라의 추가 공세를 대비하게 했다. 그러나 석륵이 3만 명을 이끌고 위군, 급군, 돈구를 침략했을 때 이를 저지하지 못했고, 석륵은 뒤이어 위군 태수 왕수를 삼대에서 살해했다. 309년 3월, 사마월은 형양에서 낙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그는 거듭된 패전으로 자신의 권위가 추락했다고 여겨 근심하고 있었고 조정의 신하들이 자신에게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에 측근 유여, 반도가 사마월에게 무파 등을 죽이라고 권고하자, 사마월은 마침내 무파 등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무고하고 3월 26일에 평동장군 왕병을 파견하여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인솔해 궁궐로 난입해 황제의 눈앞에서 무파 등 10여 명을 끌고 가 참수했다. 회제 사마치는 황태제였을 때 무파와 친하게 지냈고, 즉위한 후 무파를 중서감으로 삼으며 무파의 동생 무윤을 태복경으로 삼아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사마월이 황명을 사칭해 그들을 멋대로 죽여버릴 때 이를 막지 못하고 단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또한 사마월은 최근 들어 사건을 일으킨 것은 대부분 궁전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궁궐에 숙위하는 사람 가운데 후작을 가진 사람을 전부 파면시켰으며 자신의 부하인 하륜과 왕병에게 동해국의 군사 수백명을 맡겨 궁궐에서 숙위하며 황제를 감시하게 했다. 309년 여름 [[전조(오호십육국시대)|한나라]] 황제 [[유연(전조)|유연]]이 [[왕미(전조)|왕미]], [[유총]], [[석륵]]에게 낙양 공략을 맡기자, 사마월은 이를 막기 위해 회남 내사 왕광, 장군 시융, 조초를 파견해 그들을 막게 했다. 왕광이 황하를 건너 적을 공격하려 하자 시융이 말렸다. >저들은 험한 지역의 틈새를 보아가며 나오니 우리는 비록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지만 오히려 한 부대만이 적을 맞게 됩니다. 마땅히 물로 막으며 견고하게 하면서 형세를 헤아려 보고 그런 다음에 그들을 도모해야 합니다. 왕광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대는 많은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가? 시융은 물러가면서 말했다. >적은 용병을 잘하는데 왕광이 사태의 형세에 아둔하니, 우리들은 오늘 반드시 죽겠구나! 과연 그 예상대로 태행사에서 적과 맞붙은 왕광의 군대는 유총에게 대패했고 시융과 조초는 전사했다. 이후 유총은 둔류, 장자를 격파하고 1만 9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후 8월에 유총이 낙양으로 진군하자, 사마월은 평북장군 조무 등에게 이를 막게 했지만 유총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유총이 거듭된 승리에 오만해져 방비를 해두지 않다가 9월에 홍농태수 원연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밤에 유총의 군대를 습격해 대파시킨 덕분에, 사마월은 가까스로 낙양을 지킬 수 있었다. 그 후 왕준이 기흥과 선비족인 단무물진을 파견해 석륵을 비룡산에서 공격해 격파했다. 이에 한나라 황제 유연은 10월에 유총과 왕미, [[유요]], 유경을 파견해 5만 기병을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사마월은 이들을 상대로 결사적으로 항전해 승리를 거두고 적의 장수 호연랑의 목을 베었다. 이에 유연은 아직 낙양을 공략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렇듯 외적을 상대로 분투해 낙양을 지켜낸 사마월이었지만, 이후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각지에서 반란이 빗발쳐 진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흉노족이 세운 한나라는 갈수록 관중 일대를 잠식하며 낙양을 위협했으며, 사마월로부터 낙양으로 올라와서 국가를 수호하라는 지시를 받은 각 봉국의 왕들은 이를 무시했다. 사마월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 석륵을 치겠다고 건의했다. 이에 회제 사마치가 물었다. >지금 흉노 오랑캐가 침입하여 경기 지역 근교를 압박하여 사람들은 굳건한 의지를 갖지 못하고 있소. 조정과 사직은 공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멀리 나아가 뿌리를 외롭게 할 수 있겠소? 사마월이 대답했다. >신이 출동하여 다행히 적을 격파하면 나라의 위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니 오히려 앉아서 곤궁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후 사마월은 11월 15일에 갑옷 입은 병사 4만 명을 거느리고 허창으로 진군하면서 아내 배씨와 세자 사마비, 용양장군 이운, 우위장군 하륜을 낙양에 남겨뒀다. 또한 구희에게 명령해 왕미, 석륵을 공격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구희는 청주로 진군하여 왕미의 부하 조억을 공격했으나 311년 1월 14일 조억에게 패배해 고평으로 달아났다. 이에 하남윤 반도, 상서 유망 등이 구희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참소하자, 이 소식을 접한 구희는 화가 나 표문을 올려 반도 등의 수급을 내놓으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마원초(사마월)는 재상이 되어 공평하지 아니해 천하를 혼란스럽게 했는데, 나 구도장(구희)이 어찌 옳지 않은 사람에게 부림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구희는 마침내 격문을 여러 주로 보내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며 사마월의 죄상을 늘어놨다. 이때 회제 사마치 역시 사마월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조명을 어기는 걸 싫어했고, 앞서 자신의 측근들을 자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해버린 만행을 보며 사마월에게 원한을 품었다. 게다가 사마월이 남겨놓은 장수 하륜 등이 '''신하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공주들을 능욕'''하는 짓까지 저지르자, 황제는 마침내 분노를 터트렸다. 그는 비밀리에 구희에게 서신을 보내 사마월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구희가 자주 황제와 문서를 주고받자, 이를 의심한 사마월은 유기에게 이를 엿보게 했다. 마침내 황제와 구희가 밀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마월은 구희의 죄상을 폭로하는 격문을 각지에 보내고 종사중랑 양모를 연주자사로 삼고 서주자사 배순과 더불어 구희를 토벌하게 했다. 구희는 이에 맞서 기병을 파견해 반도를 잡으려 했으나 반도가 도망쳐버려 무위에 그쳤고, 대신 상서 유증, 시중 정연을 잡아 목을 베었다. 사마월은 황제가 자신을 모살하려 했다는 것에 분노하다가 중병에 걸려 311년 3월 19일 사망했다. 낙양에 있던 사마월의 심복 태위 왕연, 용양장군 하륜, 이군 등은 사마월의 미망인 배씨와 함께 사마월의 상중을 감추고 그 아들 진군장군 사마등을 받들어 동해로 가려고 했다. 이때 귀족, 고관, 백성, 군사 등 10만여명이 함께 낙양을 탈출하여 동해로 떠났는데, 도중에 석륵에게 습격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노예로 팔린다. 사마월의 관도 부서지고 시체는 끌어내어져 불태워졌다. 배씨는 노예로 팔렸으나, 도망쳐 [[원제(동진)|중종 원황제]]에게 의탁했다. 중종 원황제는 강남으로 천도하고 사마월에게 시호로 효헌(孝獻)을 내리고 자신의 3남 사마충(司馬沖)을 동해왕에 봉해 사마월의 양자로 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