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천 (문단 편집) == 평가 ==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선택을 두고 가족들과 지인들을 제외하면 당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멸시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더욱 발분해 기원전 90년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태사공서]]》를 완성한다. 이 태사공서가 훗날 이름이 바뀌어 전하니 그 이름이 바로 '''《[[사기(역사책)|사기]]》'''다. 사기는 그 책이 사찬서(私撰書)임에도 중국의 정사인 24사에 항상 포함되면서 나머지 사서를 압도하는 위엄을 뽐냈다. 사기와 한서, 삼국지, 후한서의 이른바 전사사(前四史)를 제외한 다른 정사서는 모두 관찬서(官撰書)이다. 《태사공서》는 그동안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 방식과 구별되는,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인 [[기전체]](紀傳體)를 확립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동양 역사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사전]]이다. 이러한 사기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태사공서》에는 한무제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아무리 자신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당대의 권력자이며 황제인 한무제를 사마천 자신이 비판했으리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세의 가필이란 의혹을 받는다. 하지만 사마천은 [[잃을 게 없다|잃을 게 없는]] 인물이었기에[* 본인 스스로도 자기는 궁형을 받고도 '''"치졸하게"''' 살아있는 이상 자기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어차피 죽을 마당에 황제를 욕한다 해도 별 페널티는 없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가필이라는 물증도 없다.[* 물론 사기 전체 내용을 보면 후대에 더해지고 빠진 부분들이 여럿 보이지만, 무제에 대한 비판이 가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얘기.] 한문학자들 가운데서는 효무제 본기의 문체가 지나치게 다른 부분과 달라 후대의 가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그 외에도 한무제의 전 황제인 [[한경제]] 본기도 그 내용이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가필 의혹을 받고 있다. 사마천 이전에 역사라는 개념은 주로 역(歷)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1년의 개념을 준 달력에 중심을 둔 생활중심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 사후로 역사(歷史)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이는 역사의 개념이 도덕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역사로 바뀌었다는 것이자 '''태사공 사마천의 업적을 기리겠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사마천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사마천은 분서령 이후 아직 여러 군데에 여러 형태로 상당히 잔존해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모아 《사기》에 담았다. 프랑스의 사마천 연구자 샤반은 사마천이 종종 지방의 역사를 그대로 옮겼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사마천은 위나라(권 44), 연나라(권 34)에 대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우리 군대’, ‘우리 성’, ‘우리 도읍’ 등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사마천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료들을 얼마나 살려내려 노력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열전> 등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망실 위기에 놓인 역사들이 <사기>에 수록되거나 녹아들어 살아남는다. 나아가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사료의 저자는 물론 그의 문장 스타일, 그의 생애, 나아가 저작 자체도 모으고 연구했다. 그래서 저작에 나오는 주요한 문장이 발췌돼서 실리곤 했다. 바로 이 덕분에 고대의 진귀한 문장들이 후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은 천재적인 학자 가의의 과진론(過秦論)[* 진나라의 실책에 관한 연구]과 시 2수도 발굴해 보존시키고 있다. 나아가 사마상여의 이색적인 작품인 부(賦)[* 중국 시문의 한 형식],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기 전에 지은 부(賦), 한비자의 세난(說難)[* 유세하는 것의 어려움을 주제로 쓴 글], 명의 편작의 의론(醫論)[* 의학에 관한 글]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렇게 해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사마천은 동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진시황이 전국 각지에 남긴 5개의 각석(刻石)을 비롯해 한나라의 황제들이 그 황자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줄 때의 수령문, 항우와 유방의 시 같은 게 그런 예이다. >[[역발산기개세|내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는 세상을 뒤덮을 수 있건만]]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추(騶)]]도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우희|우(虞)]]여! 우여! 너를 어찌 하리. 수많은 공적인 보고서, 명령문서, 변론, 담화 등도 모두 사마천의 손을 거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오자서]]와 [[손빈]]이 울분을 딛고 복수에 성공하며, [[노자]]와 [[공자]]가 천지와 인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영원히 소멸될 수도 있었던 고대의 영웅들이 사마천의 손을 통해서 부활한 것이다. 사마천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기’를 저술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했던 14년 동안 수많은 과거의 인물들이 살고 죽은 이유를 기록하고 전하면서 그 인물들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동시에 자신도 해원했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가 감응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억울함과 치욕을 알아줄, 《사기》 저술의 집념을 알아줄 또 다른 청운지사를 기다렸다. 사마천의 그 바람은 이루어졌고 《사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사마천은 [[불멸]]의 존재로서 살아있다.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서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서사문학으로서의 전(傳)이라는 장르는 사마천의 태사공서 중 열전에서 비롯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특히 한문학에서는 문학과 비문학 간 경계가 불분명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열전의 구조와 정신을 그대로 본딴 실전이 나타나고, 여기에 허구적 형상화를 거친 탁전,[* 실제 인물의 전기를 마치 가상인물의 전기인 것처럼 가탁하여 쓴 것이다.] 가전 등의 형태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몇몇 전들의 경우 아예 사마천의 열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전은 훗날 소설(小說)로 이어지는데, 주로 단일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전책 양식의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사기 중 회음후열전은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 통일의 큰 역할을 맡은 [[한신]]의 이야기다. 여기서 한신이 젊은 시절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수모를 당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런데 사마천은 의도적으로 한 구절을 끼워 넣었다. '''"한신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봤다.(信孰視之)"'''[* 孰은 熟과 통하는 글자]는 네 글자다. 심리적 갈등과 인내, 내면적 성장의 깊이가 함축된 문장이다. 사마천은 기존 자료로 작업하면서도 그것을 재구성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기의 문학성이야말로 인간을 입체적이고 폭넓게 묘사할 수 있었던 열쇠다.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해 비장하게 자결한 [[항우]],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형가]], 자신을 알아준 [[지백(춘추시대)|주군]]의 복수를 위해 칼을 뽑아든 [[예양]] 등은 그런 사마천의 붓끝에서 피와 살을 얻어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난다.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감성과 깊이, 현대 시나리오를 방불케 하는 치밀한 설정과 구성,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자유자재로 상승과 하강을 그리는 변화무쌍한 문장이 《사기》를 불멸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백이열전>에서 불행한 삶을 산 [[백이와 숙제|의인]]과 천수를 누린 [[도척|악인]]을 대비시키는 말인 "살인 강도짓과 인육을 먹는 짓만 일삼은 천인공노의 악당 도척은 천벌은 커녕 잘 먹고 잘살며 명을 다했는데 비해, 의로운 형제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깊은 곳에 풀만 캐 먹자 결국 아사하였다."라고 한 뒤 돌연 간결한 문장으로 [[악의 문제|'''"몹시 헷갈리는구나! 천도란 옳은가, 그른가(天道是耶非耶)"''']]라고 절규할 때, 독자도 함께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