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숭지 (문단 편집) === 죽음 === 사숭지는 어쩔 수 없이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주거지에 부제를 건설하고 인근에 운수벽(雲樹壁)·낚시대(魚臺)·삼계교(三溪橋)를 세워 한가로이 살았다. 이종(理宗)은 그동안 세 차례 사숭지의 복직을 원했으나[* 한 번은 순우(淳祐) 6년, 한 번은 순우(淳祐) 10년, 정청지(鄭淸之)는 얼마 남지 않았고, 다른 한 번은 보우(寶祐) 4년, 만년(晩年)에 촉(蜀)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때마다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실을 맺지 못해 사숭지는 13년을 유휴(遊休)하고 말았다. 보우 4년(1256년) 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에 서임되어 읍을 가봉하였다. 보우 5년 8월 27일(1257년 10월 6일),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소사(少師)·안덕군절도사(安德軍節度使)로 추증하고 노국공(魯國公)에 진봉하여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고, 가휘(家徽)로 '장숙(莊肅)'이라 고쳤다. 덕우(德祐, 1275년~1276년) 초년에 우정언(右正言) 서직방(徐直方)의 진언으로 인해 시호를 박탈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