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육신 (문단 편집) === 조선 전기의 미복권 === 사육신은 단종과 마찬가지로 사육신의 난 이래 수백년간 신원이 되지 못하고 [[역적]]으로 여겨져 단종보다도 더욱 나쁜 대접을 받았다. [[남효온]]의 '''[[육신전]]'''은 위에 언급된 심문 과정 등이 모두 실려 있어서 사육신의 행장에 연결될 정도이나, 생육신으로 1454년생인 남효온은 성삼문이 죽은 1456년에는 '''겨우 3살'''이었으니 이를 직접 봤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전기 문학'''으로 분류된다. 당연히 이런 책은 임금이 유학자들과 토론하는 [[경연]]에서 강의가 될 수가 없다. 헌데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연관, 판서 박계현[* 이 사람 아버지는 [[진성대군|중종]] 시기 [[영월]]군수로 부임한 후 [[이홍위|단종]]의 넋을 위로하는 제를 지낸바 있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중종 연간에 이미 영월 지역에 단종에 대한 설화가 만들어져 있었고 사대부와 백성들 사이에 단종에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선조(조선)|선조]]에게 남효온의 육신전을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호기심이 동한 선조는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그 반응은 매우 격렬했다. '''"성삼문 등의 행적이 말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0906001_002|#]] 주 내용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된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거나 [[자결]]을 하거나 했어야지, 세조 밑에서 녹봉은 받아먹으며 섬기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말도 안 된다"는 논리였다. 성리학적 입장에서만 보면 틀린 논리가 아니다. 나으리니 신하 신 대신 클 거를 썼느니 하면서 육신전에서 실드를 중점적으로 치고 있는 부분도 이 대목으로, 세조의 정통성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튀어나가야 했다.'''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뭔가를 해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원래 성리학의 명분론은 그렇게 융통성이 있는 체제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종이 등용한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성종이 지적한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다. 김종직은 김일손의 스승으로 [[조의제문]]을 지어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인데, 그가 출사한 시기의 왕이 '''[[세조]]'''다. 세조 아래에서 벼슬은 벼슬대로 하고 뒤로는 조의제문으로 계유정난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허균]]이 김종직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한다.] 선조는 이런 논리로 '''"책을 찾아서 모조리 불사르고, 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까지 치죄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선조 자신은 "[[노산군]](단종) 묘에 망주석과 상석, 표석 등을 세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무조건 세조만을 옹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육신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삼공이 들어서서 반대하는데, 이때 논리가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에 차이가 있다. 자세한 건 [[육신전]]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