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조영웅전/등장인물 (문단 편집) === [[전진교]] & [[전진칠자]] === * '''[[왕중양]]''': 배우는 1983년판 이건천. * '''[[마옥]]'''[* 실존인물로 전진칠자 중 손불이와는 부부사이다. 마옥이 손불이보다 4살 연하로 마옥과 손불이는 왕중양이 거둔 첫번째 제자로 다른 다섯 제자들과 이들 부부는 적게는 4살에서 20살까지 나이 차이가 나 전진칠자 중에서도 최고 배분이었다. 왕중양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 전진교 2대 조사가 되었다.]: 배우는 1976년판 탕금당, 1983년판 장영재. * '''[[손불이]]'''[* 실존인물로 전진칠자 중 마옥과는 부부사이다. 손불이가 마옥보다 4살 연상으로 마옥과 손불이는 왕중양이 거둔 첫번째 제자로 다른 다섯 제자들과 이들 부부는 적게는 4살에서 20살까지 나이 차이가 나 전진칠자 중에서도 최고 배분이었는데 사조영웅전에서는 전진칠자의 홍일점이라는 것때문에 어리고 연약하다는 묘사를 위해 전진칠자 중 가장 막내로 넣었다. 이때문에 사조영웅전에서는 전진칠자 중 첫째인 마옥과는 부부인데 나이 차이가 18살이나 차이가 나게 되었다. 원래라면 막내인 광년자 학대통이 마옥과 나이 차이가 17살이기 때문에 사저영웅전에서 학대통 보다 어리다고 나온 손불이는 마옥과 최소 18살이 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조협려 1판에서는 양과와 소용녀를 사부와 제자 사이라고 반대하면서도 속으로 서로 죽고 못사는 둘을 보고 마옥과의 신혼생활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데 자기가 반해서 마옥에게 시집갔다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손불이는 마옥이 진선의 재목으로 보고 시집갔었다. 차이점은 실존인물인 마옥과 손불이는 당시의 결혼적령기인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에 혼인했다는 것. 손불이는 생전에 [[해릉양왕]]으로부터 나라를 기울여 위태롭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경국지색]](傾國之色),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를 뜻하는 단순호치(丹脣皓齒),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난 미모라는 천하일색(天下一色), 꽃 같은 얼굴에 달 같은 자태를 뜻하는 화용월태(花容月態), 세상에 견줄 사람이 없는 미인을 뜻하는 절세미인(絶世美人)이라는 수식어를 모두 받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그로인한 고초를 많이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평가로 중국 4대 미녀 중 하나에 들어가야 한다거나 중국 5대 미녀로 손불이를 넣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배우는 1976년판 호인인, 1983년판 정가위. * '''[[담처단]]'''[* 실존인물로 전진교 2대 조사인 마옥에게 의발을 전수받아 전진교 3대 조사가 되었다.]: 배우는 1983년판 이국린. * '''[[왕처일]]'''[* 실존인물로 원래라면 나이의 순서에 따라 전진교 4대 조사가 되어야 했으나 본인이 관심이 없어 유처현에게 양보하였다. 구처기에게 넘기지 않은 건 구처기가 당대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송나라를 핍박하던 금나라, 몽골과 교류를 하자고 하는 등으로 인해 다른 전진칠자 등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배우는 1983년판 양소적. * '''[[구처기]]'''[* 실존인물로 전진교 4대 조사인 유처현에게 의발을 전수받아 전진교 5대 조사가 되었다. 5대 조사가 된후 금나라에 자리를 잡고 교세를 확장하였고 금이 쇠퇴하고 몽골이 융성하여 원나라를 세우자 원나라로 교단을 옮겨 교세를 확장하여 칭기즈 칸으로부터 사후 묘도광화진인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모국인 송나라를 핍박하던 금과 원에 차례로 교단을 옮기는 행위로 인해 후대의 역사학자들에게서는 비판을 많이 받는 편이다. 김용의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에서 무공에 심취해 일을 그르치거나 제자를 잘못 기르는 것들은 실존인물인 구처기를 비판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배우는 1976년판 맥천은, 1983년판 하우. * '''[[유처현]]'''[* 실존인물로 전진교 3대 조사인 담처단에게 의발을 전수받아 전진교 4대 조사가 되었다.]: 배우는 1983년판 맥자운. * '''[[학대통]]''': 배우는 1983년판 정번생. * '''[[윤지평]]'''[*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인 구처기의 제자이자 전진교 6대 조사로 자는 태화(太和), 도호는 청화자(靑和子). 신조협려에서는 소용녀를 겁탈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전진칠자나 윤지평 모두 실존 인물인데 전진교 6대 조사이자 견실한 도사인 윤지평을 소용녀를 겁탈한 악행으로 묘사하여 후손들이 항의하자 신조협려를 개작할 때 견지병이라는 오리지널 캐릭터를 등장시켜 개작 전의 신조협려에서 윤지평이 저지른 악행을 견지병이 한 것으로 설정했다. 윤지평은 신조협려 개작에서는 초반부에 교단 사무에는 관심이 없고 도가의 수행에 심취하여 속세와는 거리를 둔다는 설정으로 초반에 하차시켰고 구처기의 대사에 자신은 무공에 심취해 사부인 왕중양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지만 자신의 제자인 지평이 도가의 수행에 전념하여 전진교의 후일을 맡길 수 있다고 흐뭇해하는 것으로 그가 구처기 사후 조사로 내정되었음이 나오는데, 이는 실존인물인 윤지평이 구처기의 뒤를이어 전진교 6대 조사가 되었다는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실존인물인 윤지평은 하북성 창주 출신으로 스승인 구처기가 1219년에 서정을 하던 칭기즈 칸의 부름을 받아 서역의 대설산의 아무강(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갈 때 동행하던 18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1227년에 스승인 구처기가 사망하자 장춘궁 동쪽에 백운관을 지었으며 1229년에는 그 장소에 처순당을 짓고 스승인 구처기의 시신을 매장했으며 묘도광화진인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원나라 1대 황제인 칭기즈 칸의 지지를 얻어 더욱더 전진교의 번영을 가져왔으며 이후에 이지상, 장지경, 왕지탄, 기지성 등의 구처기의 제자들이 조사 직을 독점 계승하는 등 전진교의 용문파는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 문제는 구처기의 제자들이 전진교의 조사직을 독점하고 교단의 핵심 지위를 독점하는 등 폐단을 일으키며 다른 전진칠자 및 그 제자들과 불화를 일으켰고, 이로인해 용문파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전진교를 차례로 떠나게 되고 구처기의 용문파도 전진교의 막대한 재산을 두고 내분을 일으켜 전진교는 몰락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에게서 전진교 몰락의 시초는 구처기가 만들었다면 실제 몰락의 장본인은 윤지평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김용이 신조협려 개정 이전 판본에서 윤지평이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나 신조협려에서 소용녀를 겁탈 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도 전진교를 몰락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윤지평을 비판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배우는 1983년판 광좌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