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직 (문단 편집) === 개요 === '''사직'''(社稷)은 [[동아시아]]의 유교를 받아들인 전제왕조에서 토지를 지키는 신인 "'''사(社)'''"와 곡식을 지키는 "'''직(稷)'''"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자 그들에게 지내는 유교식 제사를 이른다. 농경사회에서 토지와 곡식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는데, 고로 이를 지키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종묘]]와 더불어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때문에 TV프로 [[알쓸신잡]] 시즌 2에선 과거 왕조 시대의 풍요와 물질적 욕망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사직단이였다면, 현대엔 아파트나 마천루가 이에 비견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사직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제사이며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때 수입돼 제사 지내기 시작했다. 사직 제사도 급이 있는데 [[천자]]의 사직 제사명은 대사(大社) / 왕사(王社)[* 사직제도가 만들어졌을 땐 중국 왕조엔 황제호가 없었다. 왕호만이 천자를 대표할 시절에 만들어 진 것이다.]이고 [[제후]]는 국사(國社) / 후사(候社), 제후 밑의 대부(大夫)급은 치사(置社)라고 한다. 삼국 시대의 사직 제사 방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삼국사기]] 잡지에서 삼국의 사직 관련한 여러 부족한 기록들을 모아두고 있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32r&position=-1|#]] 고려 왕조의 사직 제사 방식은 고려사 예지 사직에 상세히 나와있다. 성종 대에 [[절일]], [[태묘]], [[원구단]](圜丘壇), 방택(方澤) 등을 설치할 때 같이 설치했으며 대사(大社)라 불렀다. 오방색의 흙을 쌓아 단을 만들었고 대사(大社), 대직(大稷)의 신위를 만들어 후토구룡씨(后土勾龍氏),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해서 제사지냈다. 성종 이후 충혜왕까지 제사지낸 기록이 있다. 사직대제라 하여 사직에 대한 제사는 현대 한국에서 중요무형문화제 제 1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자체나 유교 관련 단체들이 사직을 지내야할 때가 되면 사직단에 모여서 제례를 올리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지역 축제처럼 다루어 질 때도 있는 모양. 동아시아 왕조에서 국가의 운명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자주 쓰였는데, 현대 사극에서도 자주 나오는 "[[조선]] 500년 '''종묘사직'''", "'''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같은 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