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타족 (문단 편집) == 역사 == 서돌궐이 강성했으나 지속된 [[내전]]과 [[당태종]]의 연이은 공격으로 657년, 결국 서돌궐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서돌궐이 멸망하자 사타족은 당의 기미주인 영주로 거처를 옮겨 당에 귀부했다. 이후 사타족은 당태종을 따라 [[고구려]] 원정과 [[설연타]] 원정에 나서기도 하였으며, 설인귀를 따라 [[철륵]] 토벌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후 당나라는 공을 세운 추장 주야금산을 [[북정도호부]]의 관할을 받도록 하였다. 712년, 사타족은 [[토번]]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정주 막하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현종]]은 주야보국(사타부락의 추장으로 추정)을 금만주도독에 임명하였다. [[안사의 난]]으로 당의 서역 지배권이 [[토번]]과 [[위구르 제국]]에 넘어가자 정원 연간 사타 역시 당을 버리고 토번에 귀부했다. 이로부터 사타는 토번이 당의 변경을 침입할 때마다 선봉으로 나섰다. 790년, 토번의 명장 줘치수가 북정성을 공격했을때도 사타의 협력이 있었다. 당시 [[서역]] 일대는 토번과 위구르 제국이 지배권을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고 있었다. 얼마 후에 위구르 제국이 양주 점령하여 서역 일대가 어수선해지자 토번은 사타의 이심을 미리 예방하고자 이들 거주지를 이주시키고자 모의하였다. 808년, 그러자 주야진충은 무리 3만을 이끌고 다시 당으로 내투했다. [[당헌종]]은 조서를 내려 사타를 염주에 거주시켰고, 음산부를 설치했다. 또한, 당나라가 직접 양과 소를 매입해 사타의 재력을 충당시켰다. 이후 당나라는 사타를 삭주로 사민하였다. 847년, 토번이 회흘과 연합해 당의 하서를 침공하자 사타의 추장 주사적심이 당군과 연합해 토번군을 격파했다.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 농민세력이 강소성 일대와 산동성 남부, 안휘성 북부까지 미치자 당나라는 사타, [[토욕혼]] 등의 이민족 군대를 편성했다. 주야적심과 아우 주야적충이 반란을 불시에 진압했다. [[방훈의 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주야적심에게 이국창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부친을 따라다녔던 [[이극용]](李克用)은 당말에 일어난 [[황소의 난]]을 진압하고 경조를 회복했다. 이후에 중서령에 이르렀고, 진왕으로 책봉되었다. 손자 [[이존욱]]은 923년, [[후량]]을 멸망시키고 [[후당]]을 세웠다. [[오대십국]]시대에도 사타족 출신인 [[후진]]의 [[석경당]],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의 [[유지원]] 등이 있었다. [[후촉]]의 건국자 [[맹지상]]도 사타족으로 추정된다. [[발해]]를 멸망시킬 때 [[거란]]을 도왔던 세력 중 하나로 [[요사]]에 나온다. 또는 '''발해를 멸망시킬 때 주변 지역 민족들을 평정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요나라에 복속된 사타족도 있다보니 일부는 거란을 지원했을 수도 있다. [[분류:튀르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