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회민주주의 (문단 편집) == 사상의 흐름 == 사람에 따라서는 그 출발부터 [[마르크스주의]]와 명백히 구별하여 분류하려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특히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로베스피에르]], [[주세페 마치니|마치니]] 같은 급진주의, 공화주의 전통을 사회민주주의의 한 뿌리로 보기도 한다.] 위의 문단에서 설명했듯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중심이론은 물론 그 역사 및 발생계통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그것의 비현실적 주장을 일부 수정하며 진화해 온 이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수정주의 논쟁 이전에는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용어 자체가 단지 "사회주의자"의 별칭에 불과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부터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창당한 "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SDAP)"에서 나왔고, 라살이 창당했던 전독일노동자협회가 (라살의 사후) SDAP의 립크네히트의 주도로 통합이 되면서 1875년, 오늘날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D)"이 탄생하게 된다. 이 시점까지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별칭일 뿐이었다. 이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회주의와 오늘날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분리가 시작되는데, 1876년 고타강령을 갖고 벌어진 마르크스(고타강령비판)와 점진적 개량주의를 들고 나온 베른슈타인의 논쟁이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현대에 와서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1959년의 고데스부르크 강령선언) 공식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와 결별을 고하면서 제도권 의회정치 내의 중도적 정당 운동으로써 확실히 자리를 매김 하게 된다. 즉, 하이델베르크 강령(1925년)까지만 해도 여전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사유재산에 기반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소유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기본 목표로 제시하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이 들고 나온 개량주의는 폭력이 아닌 설득을 통해 체제를 개혁하자는 면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와는 분명 거리를 두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보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더 큰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는데, 특히 [[파시스트]]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 서로간의 관계는 앙숙지간이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이 집권하면 그들이 망한 이후 공산당이 승리하리라 생각하고,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즘'이라고 음해하는 데 더 열중하였고, 반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독일에서 나치즘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오히려 그 기회를 틈타 공산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격퇴하려 했다. 왜냐면 애초에 이론 정립화와 결집 과정이 베른슈타인을 필두로 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마르크스 사이의 이론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곧 붕괴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본주의 붕괴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