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마리노 (문단 편집) === 근대 === [[1463년]] 산마리노는 세라발레(Serravalle), 파에타노(Faetano), 몬테자르디노(Montegiardino)를 합병함으로써 영토 확장을 마무리하고 지금의 국토를 완성했다. 16세기에는 두 차례의 멸망 위기를 겪었다. [[1503년]]에는 [[체사레 보르자]]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동해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고 체사레가 몰락하면서 벗어났다. [[1543년]]에는 이후 교황이 되는 [[율리오 3세|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의 조카 파비아노가 500여명의 군사로 공화국을 점령하려 했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실패하였다. [[1631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독립국임을 인정했으며, [[1815년]] [[빈 회의]]에서도 독립국으로 승인, 마침내 전 [[유럽]]의 승인을 따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중립을 지켰으며,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때 나폴레옹이 영토를 넓혀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웃과 분쟁을 겪고 싶지 않다고 거절, 대신 식량과 대포 4문[* 대포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을 선물로 받았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는 [[주세페 가리발디]]가 산마리노에 올라가 숨기도 했다. 이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후국 중 일부가 가리발디와 산마리노를 비난하면서 공격을 가했지만 '''격퇴했다.''' 이탈리아 통일 후 산마리노가 독립을 인정받게 된 데에는 이때 가리발디를 도운 공적도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고려되었다고 한다. [[1918년]]-[[1920년]] [[스페인 독감]]으로 나라 인구의 80%가 [[인플루엔자 A]]에 감염되어,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 당시 전체 인구의 40%가 감염된 것을 감안하면 이 80%는 매우 높은 비율이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치사율은 1.9% 정도로 세계 평균과 비슷했다. 산마리노는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환자를 받을 [[병원]]이 없는데, 이탈리아가 '''산마리노는 다른 나라'''라며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2% 정도인 당시 스페인 독감의 치사율은 산마리노에서 10%에 가까웠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치료 대기만 하다가 죽어나가는 사람이 나왔기 때문이다. [[1922년]]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이탈리아|파시즘 정권]][[로마 진군|이 들어서자]] 산마리노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22년 결성된 [[산마리노 파시스트당]](PFS)은 1923년 4월에 첫 집정관(줄리아노 고치)을 내었고, 1926년부터 1943년까지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이 유일 합법정당이 되어 다른 정당의 활동은 일절 금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산마리노는 중립을 지켰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산마리노가 중립을 지킨 이유는 이탈리아와 달리 산마리노는 '''[[아돌프 히틀러]]를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이 집권했지만 [[방공 협정]]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무솔리니]] 역시 산마리노의 중립에 [[씁 어쩔 수 없지]]라며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잠시 파시스트 정권이 실각하였다가,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에 진입하자 1944년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은 산마리노 공화국 파쇼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집권하다가 동년 11월 해체된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선]]이 생기자 [[나치 독일]]군이나 [[연합군]]이나 산마리노로 일부 피난하기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