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시성(산서성) (문단 편집) == 역사 == 오악 중 북악이 위치해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의미의 초기 중국의 북쪽 경계선상에 위치했으며, [[만리장성]]이 지나가고 북방 초원 [[유목민]]들을 방어하고 때로는 영향을 주고받는 지역이었다. 초기에는 중원 [[화하족]]과 구분되는 [[융적]]이 살았고 화하족과 섞여 동화, [[춘추전국시대]]에는 [[진(희성)|진(晉)나라]]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었다. 이후 진나라가 공중분해되어 [[삼진(전국시대)]] 세 나라로 나뉘었고 [[한나라]] 때에는 [[병주]](幷州)였으며 [[흉노]]가 분열하자 북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남흉노를 이곳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원소]], [[조조]]의 강대한 육군력을 책임졌지만 유목민의 고삐가 풀린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평양]](平陽)[* 린펀.]이 [[흉노]] [[전조]]의 초기 수도였으며, [[남북조시대]]에는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 다퉁(大同).] 부수도 평안(平安)[* 타이위안.]으로 역시 중추지였고 [[당나라]] 때에는 하동도(河東道)였다. [[오대십국]]시대 때에는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北漢)]]의 본거지였다. 이때 후주와 북한의 명운을 가른 전투가 바로 [[고평 전투]]이다. 이후 북부가 [[연운 십육주]]로 [[송나라]]에서 벗어났다가 [[명나라]] 때 ~~드디어~~ 산서성이 설치되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영국 웨일스 출신의 티모시 리처드(중국 이름: 리티모타이=李提摩太)가 선교사업을 벌인 곳으로 잘 알려졌다. 티모시 리처드는 1877∼1879년 산시성의 대기근 때에는 구조에 힘 썼고, 이후 8년간 산시성 각지에서 전도하였다. 단순히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 ·지식을 중국인에게 소개하는 단체인 광학회(廣學會)를 주재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고, [[캉유웨이]] 등 [[변법자강운동|변법파]]와 [[이홍장]] ·장즈둥(張之洞) 등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의화단의 난]]이 있었을 때에는 그 배상금을 중국의 문화사업에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돈으로 1902년 산시대학(山西大學)을 건립하고 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점진적 개혁을 주창함으로써 혁명파인 [[쑨원]] 등의 지지를 못 받자 1916년 중국을 떠나 귀국하였다.] [[중화민국]] 시기에는 군벌 [[옌시산]]이 이곳을 기반으로 1912년부터 1949년까지 38년 간 사실상의 독립왕국을 경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