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시성(섬서성) (문단 편집) == 역사 == [[신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은 '''채색[[토기]]'''가 특징인 양사오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한족]]의 본거지로, 이곳의 기산에서 일어난 [[주나라]]는 동진하여 황하 중류의 [[상나라]]를 멸하고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고대에는 [[황하]]가 지나는 풍요로운 땅으로서 흔히 [[관중]], [[관서]]라 일컬어졌으며 지금의 [[간쑤성]] 지역과 합쳐 옹양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한정적인 분지 지형으로 동쪽은 [[함곡관]]만 틀어막으면 다 해결되니 수비가 쉬우면서도 탁 트여있는 동쪽 [[중원]]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면 힘을 비축하다 역으로 찌르기는 쉽고 [[북적]]과 [[서융]]으로부터 [[말(동물)]]을 얻기도 쉬워서 [[고대]]부터 중국사의 중요한 지역이었고 [[은나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 시안은 '''[[시안(도시)|1300년 가까이 중국의 수도]]'''였다. 거기에 [[로마]]에서 출발해 이 곳까지 와서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결절점이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이곳의 서부에서 [[위나라]]와 쓰촨에 위치한 [[촉한]]이 수십 년간 대치했다. 하지만 [[당나라]] 중기 이후로 오랜 [[농업]]으로 지력이 쇠퇴하고 기후 변화가 도래하였으며, 서쪽의 [[토번]], [[위구르]], 북쪽의 [[거란]]등 주변의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략이 잦아서 [[오대십국시대]]에 섬서성 일대는 몰락한다. 이미 동부 해안지역[* [[황해]] 연안의 [[톈진]], [[항저우]]나 근처의 [[베이징]], [[난징]] 같은 곳]으로 중국사의 주도권이 넘어간 것. 이후 중국사의 중심은 알다시피 [[내몽골]]에서 도래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베이징]]으로 옮겨가고 장안 일대는 자연히 버려졌다. 그러나 위수 분지 이북은 여전히 말을 기르기 좋은 곳이었으며 이곳을 잃은 [[송나라]]는 [[거란]], [[여진]], [[몽골]], [[서하]] 등을 상대할 [[기병]] 양성에 큰 어려움을 겪어 북방 방비가 어려워졌다. [[1556년]] 1월 23일 산시성의 화산에서 파멸적인 지진이 일어나 '''[[산시 대지진|83만 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다.]]''' 거기에 [[명나라]] 말엽에는 잦은 흉작으로 이 지방 민심이 불안해졌으며 이 지역의 농민이었던 이자성이 [[이자성의 난]]이 일으켜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청나라]] 붕괴 이후 군벌 [[펑위샹]]의 영지가 되었으나 [[1930년]] [[중원대전]]에서 펑위샹의 세력이 공중분해되면서 제 때 [[장제스]]에게 줄을 선 [[양후청]]이 산시성 주석으로 임명되어 양후청의 영지가 되었지만 [[1933년]] 장제스가 권력을 강화하면서 양후청은 산시성 주임에서 해임되었다. 1935년 [[제5차 초공작전]]에 쫓겨온 [[마오쩌둥]]이 [[대장정]] 끝에 이곳의 홍군에 합류하여 옌안 소비에트 시대를 열었고 1935년 시안에 서북 초비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제6차 초공작전이 준비되었으나 1936년 서북 초비 부사령관 [[장쉐량]]과 서안 수정공서 주임 [[양후청]]이 독전을 위해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휴전에 따라서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의 숨통이 트여 국민당은 기존처럼 남방 일대를 중심으로 잡고 공산당은 옌안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중일전쟁]] 이후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 [[국민혁명군|국부군]]의 [[후쭝난]]이 [[옌안|연안]]을 점령하면서 잠시 국민당의 영역에 들어왔으나 [[중국 공산당]] [[중국 인민해방군|홍군]]이 이들을 섬멸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