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라망카 (문단 편집) === 대학 === '''Universidad de Salamanca''': 공립대학. [[살라망카 대학교]] 항목 참조.[* [[http://www.usal.es|#]]] '''Universidad Pontificia de Salamanca''': [[교황청]]립 대학. 본래 살라망카 대학교의 신학부였으나, 1854년 세속화의 영향으로 해체된 것을 1940년 [[교황]] [[비오 12세]]가 복원하면서 지금에 이른다.[* [[http://www.upsa.es|#]]] 여담으로 현재 교황청립 대학의 소재지인 구시가지의 17세기 지은 구 [[예수회]] 신학교 건물 겸 클레레시아 교회에는 일화가 있는데, 살라망카 대학은 전통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과 학풍을 이은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꽉 잡고 있던 기관으로, 15세기 말-16세기 들어서 스페인에도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수회]]와 스페인 [[가톨릭교회]] 내에서 영향력과 유명인 아웃풋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라이벌 관계였다.[* 신학적으로도 대립 관계였다. 은총론에 있어서 몰리나(Louis de Molina, 1535~1600)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학파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면, 바녜스(Domingo Bañez, 1528~1604)를 대표로 한 도미니코 학파는 하느님의 '값 없는' 은총을 강조했다. 몰리나주의의 경우는 칼뱅주의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면 그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하느님 탓이 아니다"를 강조하고 싶어했다면, 바녜스주의의 경우는 "인간이 천국에 가면 하느님의 값 없는 은총 덕분이지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다"를 강조하고 싶어했다고 할 수 있겠다. 몰리나주의와 바녜스주의는 둘 다 가톨릭교회에서 단죄되지 않았다.] ~~참고로 둘 다 스페인산 수도회이다~~ 이탈리아 다음으로 남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도시였던 살라망카는 동시에 스페인 도미니코회의 본진이기도 했던 만큼 예수회는 오랫동안 살라망카에 관련 교회나 기관 하나 새우는게 염원이었고, 1617년 이 신학교 설립 허가를 받으면서 이를 이루는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시 후원자들과 건축가, 예수회 당국의 이권 문제나 역병 창궐, 대금 지불 같은 이런 저런 문제로 공사가 제대로 진척이 안 돼서 적진 한복판에 있던 예수회 수도자, 학생들은 임시 가건물에서나 공부하다 100년이 훌쩍 넘긴 1754년에야 겨우 완공이 되었다. 그리고 삐까뻔쩍하고, 무엇보다 적들의 수도(...)인 --[[칼뱅|제네바]]도, [[마르틴 루터|뷔텐베르크]]도 아닌--살라망카 시가지 한복판에 존재감 넘치는 신학교 건물[* 실제로 살라망카 구시가지 풍경을 높은 건물이나 시외 언덕, 토르메스 강 건너서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주교좌성당]]의 거대한 위용이고, 그 바로 동쪽으로 [[프란시스코 비토리아]] 같은 유명한 [[도미니코회]] 학자들이 공부했던 산 에스떼반 [[수도원]], 그리고 서쪽으로 이 구 [[예수회]] 신학교의 첨탑이다.]을 지었다고 신나하던 예수회는 1767년 스페인과 유럽 전반에서 [[예수회]] 추방령이 떨어지면서 겨우 13년만에 집비우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 미워하던 살라망카 현지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중심인 성직자 복지회(Clerecía) 건물로 사용되다가 1940년 교황청립 대학이 생기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