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수대첩 (문단 편집) == 분석 == [[교과서]]나 [[위인전]]에서는 살수 대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넘어가느라 수나라군을 무력하고 가벼운 [[오합지졸]]로 묘사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보급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대병력을 동원했다는 것 외에는 실제 수나라 측에서 큰 전술적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사람들 모두 [[중국 대륙]]의 [[통일]] 과정 중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역전의 지휘관들이었다. 특히 '''1,130,000명'''이라는 역사상 초유의 대군 앞에, 고구려가 요하 일대에 주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속에서 [[참수작전|정예병 305,000명으로 수도 평양성을 번개처럼 직공]]하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수군(水軍)이 이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병력수의 이점을 활용한 꽤 훌륭한 구상이었다. 내호아의 수군이 고건무에게 궤멸되는 등의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하여 최악의 결과가 나왔지만 훗날 불세출의 [[명장]]인 [[태종(당)|이세민]]과 그 휘하의 당나라 장수들이 요하 인근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이정(당나라)|이정]]과 함께 수나라군의 전략으로 회귀한 것을 생각한다면 구상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수나라]] 군대의 '''기동''' 또한 매우 훌륭했다. 이 대전략을 위해, 별동대 305,000명은 가려 뽑은 최정예병답게 요하 서쪽에서, 요동 천산산맥, 압록강, 청천강 등이 놓여진 수백 km를 1개월 만에 주파하여 평양에 도달했다.[* 언급했듯이 [[태종(당)|당태종 이세민]]은 아예 요하에서 벗어나질 못하여 [[압록강]]에는 접근도 못했다.] 고구려측 입장에서도 실로 최악의 국가적 위기였던 건 분명하며, 자칫하면 별동대 305,000명에게 평양이 [[참수작전]]을 당하여 그대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괴력을 발휘한 [[우중문]] 휘하 별동대의 활약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지친 상태에서 험준한 평양성을 함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호아]]의 수군(水軍) 역시 미리 상륙했으나 고건무에게 이미 박살난 상태이다 보니 호응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우중문]]과 [[우문술]]에게는 또 다른 기회도 있었다.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으로 정탐하러 왔을 때, 예의고 나발이고 팽개치며 그를 잡았더라면 수나라군의 입장에서는 유리한 양상이 되었겠지만 [[참모|참군]] [[유사룡]]이 만류하는 바람에 우중문과 우문술은 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다만, 이건 을지문덕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파견나간 상황에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 <[[역사저널 그날]]> 95화 - '살수대첩- 수나라 100만 대군 고구려를 침공하다' 편에서.] 사실 이건 [[접대의 관습|접대 관습]]의 영향이 가장 큰데, 적국의 사람이라도 일단 손님으로 찾아오면 쌍방이 서로 해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이 덕분에 사신이 적국에 비무장으로 가더라도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유사룡이 말린 것도 사신으로 찾아온 을지문덕을 죽였다간 당장에는 이득이 될지 몰라도 이후에는 국제적으로 접대의 관습을 어긴 나라로 찍혀 타 국가들이 빈번하게 쳐들어올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수나라 군대는 후대에 비해서도 고구려군의 맹점에 대해 의외로 높은 이해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 수뇌부는 수•륙 양면으로 뻗쳐오는 수나라군의 양 팔을 [[청야전술|최대한 끌어들여]] [[공세종말점|절묘한 시간차]]를 두고 잘라냈으며, 살수대첩은 이를 [[갈무리]]하여 섬멸하는 통쾌한 일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