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삼국시대(중국) (문단 편집) == 시기에 대한 견해 == 중국의 삼국시대 시기에 대한 견해는 세 개가 있다. * 1: [[후한]]이 헌제의 [[선양]]으로 공식적으로 멸망한 '''[[조비]] 즉위 ~ [[서진]]의 삼국통일'''까지의 시기. 약 400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통일제국 [[한나라]](漢)가 무너지고 위나라의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시점부터 [[진(사마씨)|진나라]](晉)가 일시적으로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60년 동안의 분열시대. 이는 곧 한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220년을 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이다. 위나라는 선양을 통해 자신들이 한나라의 지위를 대체함을 선언하였으나, 촉한과 오라는 두 거대 지방정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국 자신들도 칭제하기에 이르렀으므로 하나의 통일제국이 무너지고, 그 다음 통일제국이 탄생하기까지 3개의 독립정권이 공존한 시기를 삼국시대라 부른다는 것이다. 역사학적 개념으로써는 가장 정통적이고 명확한 해석이지만 '중국의 삼국시대'라고 말하면 대중이 흔히 생각하는 '삼국지의 이야기에 나오는 시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시대 구분 기준에 대해 <이는 한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220년부터를 [[난세]]의 시작으로 잡았을 때의 구분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184년 황건적의 난~220년 후한의 공식적 멸망 사이의 기간이 난세가 아니었다고 말할수는 없다. 다만 그 시대가 난세일지언정 통일제국 (후)한이라는 국가가 엄연히 남아있고 [[군웅할거|각지에 난립한 군벌 세력들]]이 명분상으로나마 한나라의 신하를 자처하고 있는 이상 이는 어디까지나 후한의 통치력이 약화된 후한 말기이지 새로운 시대인 삼국시대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삼국지연의》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 하도 난세, 난세하니 난세=삼국시대라고 착각하고 '한나라의 공식적 멸망이 삼국시대의 시작점'이라는 견해를 '한나라의 공식적 멸망이 난세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엉뚱하게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후한 말기에 난세가 시작되어, 그 난세의 와중에 후한이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2: 《[[정사 삼국지]]》나 《[[삼국지연의]]》에서 다루는 확장된 시기인 '''[[황건적의 난]] ~ 서진의 삼국통일.''' 《연의》 등으로 인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기. 《정사 삼국지》도 이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삼국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를 다룬다. 실제로 각종 매체에서는 [[황건적의 난]](184년)부터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때가 [[후한]]이 본격적으로 쇠락하고 각지의 군벌이 권력 다툼을 시작한 시기이다. 지방에 인사권을 행사하고 수만 명의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상태를 국가 기능 상실이라고 하진 않는다. 국가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동탁 집권 이후.[* 굳이 말하자면 황건적의 난 이후 한나라의 국가 기능이 '쇠퇴하여' 정국 장악력이 크게 낮아졌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국가 기능의 약화'와 '국가 기능 상실'은 명백히 다르다.][* 간단히 말해 황건적의 난 당시 대장군 하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그는 자체적으로 세력을 기른 군벌이 아니라 황후인 동생 덕에 높은 직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황실의 권위라는 뒷배밖에 없는 하진이 나라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와 조정의 권위가 아직은 살아있었다는 의미이다. 반면 신하인 동탁이 사실상 소제를 폐위시키면서 황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이후 동탁을 제거하고 황실의 권위와 기능을 복원하려던 [[왕윤]]의 시도가 실패하여 [[삼보의 난]]이 일어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최소한의 권위 및 조정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조직 및 기능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따라서 이후 후한의 마지막 황제였던 헌제와 그의 황실은 단지 권신인 조조에게 명분을 주는 존재가 되고, 조조의 정권이 사실상 후한의 조정을 대체하게 된다. 그러나 설령 헌제가 단 한번도 자기 스스로 권력을 행사해본 적이 없는 꼭두각시 황제였다고는 해도, 그로 인해 '후한의 국가로서 기능이 사실상 끝났다'고 평가하는 것은 과도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실무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기능'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것은 분명하지만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능'역시 국가의 핵심 기능 중 일부이기 때문이다. 당장 한나라의 실질적 권력이 상실되었음만을 보고 그 권위는 아직 남아있음을 경시하여 함부로 황제 자리에 도전했던 [[동탁]]이나 [[원술]]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도 눈에 띌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물론 이 둘의 비참한 파멸은 본인의 어리석음과 난폭함 때문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그만큼 어리석고 난폭한 인물이었기에 아직 유씨의 한나라 황실에 함부로 무시하기 힘든 상징성이 남아있음을 무시하고 함부로 덤벼들다 격렬한 저항에 맞부딪혀 파멸했다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꼴을 당하기 싫었던 조조는 평생에 걸쳐 한나라의 권신(승상)이라는 자리를 지키며 자식대에 이르러 제위를 선양받을 토대를 닦아놓는데 만족해야 했던 것. 그러니까 사백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통일왕조 한나라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그 실질권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에서도 수십년간 남아있을 정도로 끈질긴 강력함을 가졌던 것이다.] * 3: '''[[황건적의 난]]~서진의 멸망.''' 삼국시대가 [[위진남북조시대]]의 일부로 포함되긴 하지만 삼국시대 자체는 역사적으로 봐도 서진의 통일로 끝난 게 맞고,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도 서진의 통일로 끝나기에 대중적인 인식도 서진의 막장화는 《삼국지》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 허나 [[팔왕의 난]]~[[영가의 난]]까지 벌어진 서진의 멸망까지의 흐름을 기존 삼국시대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1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 사계절 출판사.] 사마씨 정권이 집권하고 통일하는 과정에서 뒷 마무리가 원활하지 못하여 [[팔왕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기간은 통일 후 10년~20년을 겨우 채운 수준이었고, 서진은 팔왕의 난 종결 10여년 후에 [[영가의 난]]으로 멸망하게 된다. 즉, 서진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과 서진이 멸망한 결과가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일들의 실질적인 종결점이라는 것이다. * 기타: 그 외 유비의 입촉, [[한중왕]] 즉위 또는 조조의 위왕 즉위, [[적벽대전]]의 [[천하삼분지계|천하삼분]]에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삼국시대를 다룬 매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삼국지]]》, 즉 역사서 《[[정사 삼국지]]》와 소설인 《[[삼국지연의]]》, 특히 《삼국지연의》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시대는 '''후한 말 [[난세]]가 시작되어 군웅들이 할거하고, 그 가운데 두각을 드러낸 셋이 할거하였다가 다시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시대라는 점이다. 즉, 《삼국지연의》는 후한 말 ~ 삼국시대를 다루는 작품이며 '삼국의 정립'과 '삼국시대의 시작'은 그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다. 당연히 시대 구별로써의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의 배경 시대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를 전제로 자세하게 보자면 후한의 완전한 멸망으로 이전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상위 권력이 사라진 헌제 선양을 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거나, 더 세세하게 따지자면 '동등한 삼국의 탄생'을 기준으로 [[손권]]의 칭제(229년)을 삼국시대의 완전한 시작으로 보는 경우, 이보다는 좀 유연한 기준으로 명목상 후한이 아직 존속하고 있기는 하나 이전까지 불안정했던(따라서 한나라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쉽지 않던) 군벌들이 정리되고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과 조직을 갖춘 세 세력이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는 시기를[* 이전까지 한나라의 [[승상]]이었던 조조의 위왕 즉위가 이 시점(유비가 입촉하였으나 아직 조조가 [[한중]]을 장악하고 있던 시점)에 일어났다. 즉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적벽대전의 패배로 조조가 [[강남(중국)|강남]] 장악에 실패하고, 유비가 [[익주]]를 장악하여 강남의 세력이 촉•오의 양대 구도로 재편성되자 조조 역시 이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며 세력을 재집결시키고 세력권을 명확히하기 위해 위왕에 즉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유비의 한중왕 즉위를 기준으로 본다면, 익주를 장악한 유비가 익주의 목구멍인 한중에서 조조의 세력을 구축(驅逐)하여 조조의 세력과 맞설 수 있는 영역을 구축(構築)함으로써 이전까지 단기간에 격심한 세력 변화를 겪을 수 있었던 [[군웅할거]]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삼국간의 장기적 대립 구도가 시작된 것을 삼국시대 시작의 기준으로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준으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관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선 세 분류에 비하면 메이저한 해석은 아니다. 이 문서는 1번의 시기만을 다루고 2번의 확장된 시기에 관한 내용은 '''《[[삼국지]]》'''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