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삼국시대(중국) (문단 편집) == 특성 == 이 시대가 이토록 혼란스러워진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내/외부적인 모순들이 수백년간 (상당수는 한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한 결과였다. - 호족 소유 토지의 증가에 따른 자작농 계급의 붕괴와 빈부 격차의 확대 - 일부 명문 호족들의 관직 나눠먹기로 인한 국가 기능의 저하 - [[왕망]] 이후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 및 윤리 수준의 저하 - [[소빙하기]] 도래로 인한 토지 생산력의 감소 - 국가 역량을 넘어선 영토 확대로 인한 국방비 지출의 증가 및 국경 병력의 이민족화/[[사병]]화 - 유능한 군주의 부재 및 환관 세력의 득세 [[이릉대전]]과 같은 대참사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국력이 열세였던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해 강대국 조위를 견제하는 1강 2약의 구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나라는 후한말 득세한 군벌의 대부분을 제거하고 중원을 장악한 나라였다. 이 당시 중원이란 [[중국 문명]]이 탄생한 [[황하]] 유역을 일컫는 표현이었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실질적인 면적으로는 약 1/3 수준에 불과했으나 당시 중국 인구와 총 생산력에서 약 7~8할을 차지했다. 반면에 손오의 경우에는 이러한 난세를 피해 변방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당시만 해도 아직 개발이 덜 된 남중국 지방의 토착 세력들과 타협하면서 세운 나라였다. 이 때문에 영토 면적은 중원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주요 거점 부근을 제외하고는 개발이 되지 않아 사람이 살기 어려웠고, 영토의 상당 부분이 이민족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까닭에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애초에 오나라에서도 남반부 지역은 한무제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월]], 민월, [[남월]] 같은 이민족 국가들이 지배했고,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다. 남월은 국왕이 한족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위만조선]]과 비슷하게 중국계 유이민과 현지 세력간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고, 민월과 동월은 한나라의 책봉을 받기는 했지만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원과 크게 달랐다. 촉한의 경우, 사천 자체는 통일제국인 [[진(영성)|진나라]]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관리되며 개발된 땅이었고, 토착 호족들도 유비 이전 통치하던 [[유언(삼국지)|유언]]이 대부분 밟아놓았던 상태라 비교적 중앙 집권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운남]] 지역은 [[남만]]과 같은 이민족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사천의 힘만으로 중원의 조위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도 삼국 간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1) 중원이 전란에 빠지면서 인구와 생산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저하되었고, (2) 촉한, 손오 두 나라의 주도하에 변방의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3) 이 두 나라가 기본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4) 조위가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두 나라를 동시에 제압하기에는 전선이 넓을뿐더러, [[흉노]], [[선비족]], [[강족]]과 [[저족]], [[고구려]] 등 여타 이민족 세력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5) 위나라 자체도 건국 과정에서의 한계로 인해 지방 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사람도 많이 죽고, 유랑민도 대폭 증가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삼국지연의]]》만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떼로 죽어나간 막장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거의 5,000만명에 육박하던 후한 시절의 인구가 고작 수십 년 만에 767만명으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저렇게 죽었다기보다는 '''호적 유실 등의 원인이 크고,''' 실제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만한 인구 손실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으로 서기 2세기의 중국 인구는 본토만 5~6,000만 명을 육박했고, 3세기 삼국시대에도 4~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별거 아니었네'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호적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것은 국가 행정 체계가 대책없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인구가 더이상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삼국지를 보면 도적에 불과한 [[엄백호]]가 1만여 명의 무리를 데리고 있다는 언급이 있고, [[감녕]]이 수적 시절 땅에서 출입할 때 수레와 기마병, 배들이 길게 늘어서 정렬했으며 온갖 금은보화로 떡칠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매우 부유하고 부하도 많은 준군벌 수준의 위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공식 관리가 아니었으니(감녕은 관직을 때려쳤다) 이들의 부하들이 세금을 내고 군역을 질리가 만무하다. 위에서 언급된 엄백호의 부하 1만여명이란 건 1만명의 병사들이란 뜻으로, 여기에 딸린 처자식이나 잡일꾼들을 합치면 최소 수만명이 엄백호의 통제 하에 있어 국가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엄백호나 감녕은 훗날 손오측 세력에 흡수되지만, 저런 '도적'들이 저들만 있었던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공식 인구의 몇배나 되는 인구가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것도 이상한게 아니다. 실제로 도적과 거리가 먼 조운 역시 공손찬에게 임관하기 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중앙정부가 무너진 시대 태어난 이들은(조운은 활동시기나 추정되는 나이로 보면 황건적의 난을 10대 중반 쯤에 겪었을 것이 유력하다) 정부의 보호를 포기하고 동네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실력자들 위주로 각자도생하는 것이 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위''' || 인구 || 4,432,000명 || || '''촉''' || 인구 || 940,000명 || || '''오''' || 인구 || 2,300,000명 || 일단 등록된 인구는 이렇지만 이걸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 혼란기였기에 유랑민이나 지방 호족에게 위탁한 소작농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조세를 확실하게 거두고 개인 경제력 유지가 가능한 인구, 그중에서도 노동력이 되는 성인 남자와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호구 위주로만 등록을 했기 때문에 저런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767만명이 갑자기 1,600만명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숫자도 실제 인구보다는 크게 적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인 역사학자 왕육민이 삼국시대의 호적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삼국시대 인구는 약 3,800만명으로 계산되었다.[[http://m.blog.naver.com/krighty21/50033851424|#]] 즉, 삼국시대에는 행정권에 들어온 인구는 약 3,800만명이었지만, 이 중에서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인구는 겨우 767만명 정도였을 뿐이라는 소리다.] 고대에는 폭정, 기아, 전염병, 전쟁이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나 계속 증가하려는 인구가 그나마 계속 죽어줘서 수백 년간 인구가 큰 증가없이 정체가 지속되곤 했다. 다른 시대에도 널린 것을 삼국시대에만 갑자기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게 그 이전의 난세였던 [[진(통일왕조)|진나라]]의 6국 통일전쟁부터 [[초한전쟁]], [[고제(전한)|한 고제]]까지의 시기, [[신나라]]의 실정과 [[후한]] 교체기에 벌어진 군웅할거 시기에도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등장하며 그만큼 시대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한 기록일 뿐이다. 국가 자체는 그나마 온전한 듯이 보여도 폭정이나 심지어 자연 조건에 따라서도 인구 변동은 있어왔다. 뭐 진정한 중국사의 헬게이트인 [[송말원초|송•원 교체기]]에 비하면 그저 그렇지만. 1200년대의 중국 인구가 1억 1,500만 명에서 1300~1400년대 7,500만~8,500만 명으로 급락하고, 155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따라잡는다. 이 시대에는 인구가 감소할 조건은 모두 갖추어 중국의 경쟁력을 폭락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금나라]] 5,000만명, [[송나라]] 6,000만명의 1억 1,000만명인 중국 인구가, [[몽골 제국]]의 침입을 거치고 [[원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강북]], 강남까지 다 합쳐도 7~8,000만명이 되어버렸다. 물론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전쟁, 기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실제 인구는 최소 배 이상은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한말 6,000만명에 육박했던 인구가 불과 수십 년 만에 등록상이라고는 해도 767만명으로 급감한 것이다. 《[[삼국지연의]]》 덕분에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에 대하여 낭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나라의 6국 통일 전쟁부터 초한전쟁까지의 시기와 신나라부터 후한으로 이어지는 군웅 할거의 [[붕괴 후 혼란기]] 여러 시기가 그랬던 것처럼 '''[[난세|엄청나게 살기 어려웠던 시대였으며, 군웅이든 무장이든 모사든 호족이든 백성이든 모두 살아남기 바빴던 시대였다.]]''' 단, 난세라면 언제나 그렇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업적도 많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개천에서 용 난다|후한 시대라면 절대 출세하지 못했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일단 삼국의 창업주들만 보더라도 난세가 아니었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명성을 남기기 어려운, 뭔가 하나씩 출신상에 하자가 있었고, 실제 역사에서는 본인들이 거느렸던 명문가 출신 귀족들에게 커리어와 인생 행보 등에서 뒤쳐졌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더불어 후한 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 개혁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이 시대의 '''[[둔전(삼국지)|둔전제]]'''는 후대 왕조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참고 사례가 되어 남았다. 유학 일색이었던 중국 사상에 법가 및 도가에 대한 재고찰이 이루어진 것도 중세 중국 문화가 풍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