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삼국시대(중국) (문단 편집) === 경제 === 후한의 멸망으로 농업이 붕괴 상태에 놓였으며, 화폐경제가 몰락했다. 후한 조정이 붕괴한 탓에 대량의 사사로이 만든 돈이 출현했다. 위, 촉한, 오 세 나라가 정립된 뒤에 새로 발행된 동전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지 못하여 포, 비단, 곡식, 등 실물을 주요 화폐로 부득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세 나라 모두 동전을 발행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경제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랬으나, 황건난~동탁의 난정 이후부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후한의 화폐가 저질적으로 폭락하고 국가가 아닌 호족들이 사사로이 만든 돈 때문에 국가가 만든 화폐 역시 이에 맞물려 가치와 신용이 떨어졌다.]] 때문에 민중들은 [[물물교환]]을 통한 경제활동이 더 가치있고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각국의 화폐제도는 화폐로 값을 치루는 데 미치지 못해서 물물교환이 다수로 있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제 1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삼국이 발행한 돈은 모두 다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그나마 나았다는 촉한의 경우도 촉의 화폐가 본국외 강남 일부 지역, 농서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정도의 한계점을 가진다. 다만 촉한의 경내(境內)에서 이루어진 무역은 화폐가 통용되는 무역으로, 이 시대에는 특수한 한 종류의 정도에 이르렀다. 촉한 화폐의 유통은 교환 경제가 활성화되어 장기화된 중원보다 우수했다. 촉한의 수도 [[성도]]는 상업적으로 또한 번영하였고 서진의 좌사는 성도의 (번영한) 상업을 묘사하였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赋)는 성도 상업의 발달로 점포가 즐비하고, 각종 진기한 상품들이 모두 시시각각으로 늘어져 있으며,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 또한 촉한의 비단은 오나라와 위나라에 팔리며 유명세를 떨쳤고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에서도 촉한의 멸망 당시 창고에 있던 금, 기, 채, 견 80만 필 중 금(錦), 기(綺)를 유명하고 진귀하며 기술요구도가 극히 높은 견직물로 인정하며, 이것을 능히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음이 촉한 수공업의 창성과 발달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강북]] 지방 쇠퇴의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시대였다. 삼국시대 이후엔 인구 급감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민호의 도주와 관개시설 및 농경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 등의 이유로 버려진 농경지가 대량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황하]] 중상류 지역의 황폐화가 [[중국사|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하였고 삼국시대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로 인해 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 중원의 경우 역대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전란을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조조가 패권을 구축하면서부터 회복의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토지 개혁과 전후 재건에서 다른 군벌들을 크게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도 자체는 기존에도 있었지만, 조조가 대단했던 점은 이를 전국 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추진한 조직력과 추진력이었다. 실제 기존의 둔전제는 일부 국경지대에 한해 한시적으로 실행된 제도였으으로 조조와는 규모/기간에서 비교가 안된다. 촉한과 손오는 세력 확대를 위해 각각 [[운남]]과 강남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특히 오나라의 강남 개발의 경우 한족이 본격적으로 장강 이남 개발에 착수한 시초로서 중국 경제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록 당대에는 아직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오나라가 이때 잡아놓은 기틀에 [[영가의 난]] 이후 북쪽에서 몰려든 우수한 농업기술을 가진 서진의 유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남조]] 시대 경제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었다.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건 빨라도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였고, 당•송 무렵에야 절정에 이른다. 이후 [[송나라]] 시대 즈음에 이르면 강남이 대체적으로 개발되어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절정에 이르름으로써 강남의 경제력이 중원을 압도하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각지에 명맥을 유지하던 소수민족들, 즉 [[무릉만]]과 [[산월]]이 완전히 중국에 복속 동화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중국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영토를 [[한족]]이 사실상 독점하기 시작한 시대가 삼국시대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