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지명 (문단 편집) == 후한 13주 == 한나라에서 주(州)는 원래 행정구역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에 유래한 [[구주#s-2|구주]] 관념에 따라 중원 지역을 구분하는 '지방' 개념이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 등을 통틀어 '[[경상도|영남]]'으로 부르지만 그것이 행정구역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제(전한)|한무제]]가 기원전 107년 자사(刺史)라는 감찰관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각 자사의 관할구역을 의미하는 '자사부(刺史部)'의 범위가 얼추 구주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그저 그 명칭에 따라 명명한 것에 불과하다. 자사의 감찰권 또한 태수를 직접 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나 현령 등을 보좌하며 행정을 총괄하는 승(丞) 이하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할 뿐이었다. 중앙 정권의 권위가 무너지면 각지의 지방관들이 군웅으로 돌변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한 [[광무제]]는 태수(太守)에게 지나친 군사권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고자, 원래 감찰관에 불과했던 자사들을 각 지방에 주둔시키면서, 여러 군(郡)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하는 변란이 발생했을 때는 각 군에서 병력을 각출해 자사에게 보내고, 자사가 감군(監軍)이 되어 그 병력을 지휘하여 이를 대처하게 했다. 각 군에서 보내는 병력은 그 군의 일부에 불과했었으므로,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사가 태수의 상관으로써 태수를 지휘하는 입장은 되지 못했다. [[영제(후한)|영제]] 때 후한의 통치 질서가 붕괴하게 되자, 각지에서 할거할 세력을 도모하고 있던 이들은 여러 개의 군(郡)을 장악함과 동시에 세력 확장에도 나름의 명분을 부여할 수 있는 직책으로 자사의 가치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유언(삼국지)|유언]]은 이에 한술 더 떠서, 공식적으로 독자적인 군(軍)을 편성할 권한까지 갖는 주목(州牧) 자리를 만들어 내 익주목으로 부임했다. [[18로 제후|반동탁 연합]]이 결성된 이래 후한의 정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벌들이 할거하게 되자,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군벌들은 제각기 주목이나 자사직을 자처하며, 부하들을 각지의 태수 등으로 임명해 보내 그들의 상관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여러 주(州)를 장악한 뒤에는 자신의 친족이나 측근을 자사로 임명하고, 독자적인 징병권을 갖는 장군직과 임지 내에 주둔한 모든 부대에 대한 군사적 작전통제권을 의미하는 도독(都督)직을 겸임시켜, 자사 직책을 명실상부한 태수의 상관 직책으로 만들어 냈다. 바로 이때부터 각 주(州)는 소속된 군(郡)의 상위에 위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자사 직책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감찰관에 불과할 뿐, 어디까지나 장군직과 도독직이 결합하여 초유의 권한을 갖게 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품관인법]]이 시행되면서 자사에게 공식적으로 각 군·국의 중정(中正) 임면 권한이 주어짐으로써 자사는 인사권까지 갖게 되었고, 결국 그 자체로 명실상부한 태수의 상관으로 입지를 다졌다. [[사마염]]이 삼국통일 이후에 이렇게 각 주의 자사가 태수의 상관으로 군림하게 된 것을 시정하고 특히 각 군에 대해 치민(治民) 권한을 더 이상 행사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구조적으로 태수를 압도하는 권한을 갖게 된 자사가 원래대로 감찰관으로 돌아갈 리는 당연히 없었다. [include(틀:후한 자사부)] *190년 무렵: [[공손도]]가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며 자신의 유주 영역을 평주(平州)로 분할함. *193년: 양주(涼州)의 하서회랑 지역을 옹주(雍州)로 분할함. *201년: 교지자사 [[장진(삼국지)#s-2|장진]]이 교주목(交州牧)으로 승격하면서 교주(交州)가 형성됨. *209년: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형주목(荊州牧)을 자칭하면서 형주가 분할됨. *213년: [[조조]]가 [[구주#s-2|구주]]를 회복한다는 구실로 13주를 9주로 재편함. *사례교위부: 폐지되어 각 군이 예주·기주·옹주 소속으로 변경됨. *양주(涼州): 폐지되어 옹주에 병합됨. *기주: 10군(郡)이 위공(魏公)의 식읍으로 설정되어 위국(魏國)에 소속됨. *유주·병주: 폐지되어 기주에 병합됨. *교주: 폐지되어 각 군이 형주·익주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나, 실제로는 [[손권]]의 영역이라 실현되지 못함. *220년: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사례교위와 유주·병주·양주(涼州)자사를 다시 설치함. *222년: 위나라가 자신의 형주 영역을 분할하여 영주(郢州)를 설치했으나 취소함.[* 조비가 손권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권이 차지하고 있는 양주(揚州)와 형주 영역을 형주로 합치고, 위나라 영역에 속한 형주 북부는 별도로 영주로 분할한 것인데, 곧 손권이 종속할 뜻이 없음을 확인하여 이를 취소했다.] 손권이 [[여범]]을 양주목(揚州牧)으로 임명함. *226년: 오나라에서 교주를 분할해 광주(廣州)를 설치하려 했으나 취소함.[* [[사섭]]이 죽은 뒤 교주자사 [[여대(삼국지)|여대]]가 사섭 일가의 영향력이 강한 합포군·교지군·구진군·일남군 4군만 교주에 남기고 나머지 구역을 광주로 분할하는 구상으로 광주자사를 자처하여 손권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격분한 사섭 일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면서 환원되었다.] *238년: [[동연]]의 패망으로 평주가 폐지되어 원상복구 됨. *263년: 촉한 멸망. 교주의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위나라에 투항함. [[사마소]]가 익주를 분할해 양주(梁州)를 설치함. *264년: 오나라에서 교주를 분할해 광주를 설치함. *269년: 서진이 옹주의 농우 지방을 진주(秦州)로 분할함. *271년: 서진이 익주의 남중 지방 일부를 분할해 영주(寧州)를 설치함. 오나라가 교주 3군을 회복함. *276년: 서진이 평주를 다시 설치함. *280년: 서진이 삼국을 통일한 뒤 사례교위를 폐지하고 사주(司州)자사를 임명함.[* 위나라 때부터 사례를 '사주'로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말엽에는 조환(曹奐)의 조서에서도 쓰일 정도가 되었다. 삼국 통일 뒤에 이 별칭이 공식화 된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