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연의 (문단 편집) == 조선전래 및 유행 == 한반도에 삼국지가 처음 들어온것은 고려말의 [[삼국지평화]]로 보이는데, 중국어 학습교재인 노걸대[[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632|#]]에서 삼국지평화를 사오는 내용이 예시문으로 존재한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81832|#]] 대략적으로 연의가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16세기]] 초중엽쯤으로 추정되는데 2000년대에 16세기 중엽 판본으로 추정되는 삼국지연의의 [[금속활자]]본이 발견된 적이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057823|해당기사]]. 발견 당시에는 가정본으로 판단했으나, 12권 구성으로 주왈교본 (가정본 이후 판본)이 아닌가, 혹은 이 둘을 기반으로 한 독자의 판본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81832|#]] 이후에도 [[적벽가]] 등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 조선만의 독자적인 삼국지 관이 형성되었던 듯하다. 대략 임진왜란 전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한국의 중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로 보인다. 위 문단에서 언급되었듯, 조선이 워낙 오래 지속된 관계로, 영조.정조대쯤은 되어야 우리가 아는 모종강본 삼국지가 나올 수 있다. 임진왜란 전후의 에피소드, 즉 선조나 이순신이 관계된 에피소드는 나관중에서 200년 정도 미래, 모종강에서는 100년 정도 과거 쯤의 중간 시대임을 인지하고 아래를 읽을것. 비슷한 시기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삼국지연의' 가 완전한 단어로는 단 한번 언급되는데, [[선조(조선)|선조]] 2년(1569년)에 [[기대승]]이 선조 앞에서 '삼국지연의라는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기대승 본인이 읽었는데 내용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한나라의 국왕까지 읽을 정도의 베스트셀러 인기소설을 남은 읽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내로남불 같아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한 걸 수도 있다. --내가 [[본인|아는 사람]] 이야기 해줄게--] 라고 이런 책이 인출(印出, 인쇄)되기까지 했다며 개탄하고 연의와 함께 [[초한지]], 전등신화와 [[태평광기]]까지 싸그리 모아서 깐다. 이 말 이전에 선조가 '[[장판파|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연의에는 있다고 들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어쨌거나 임금인 선조도 연의가 유행한 것을 주위에서 들었을 정도로 금세 알려진 책이든지, 아니면 선조도 실제로 봤는데 대놓고 봤다고 하면 좀 그러니까 그렇게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0206020_001|해당 실록 기사]] 어쨌거나 유학자의 입장에서, 실제의 역사가 아닌 창작물이 그럴싸하게 회자되는 세태가 우려되었던 듯하다. 근데 솔직히 그만큼 재미있긴 하다. 온갖가지 오락물이 넘쳐나는 지금도 수많은 [[삼국지덕후]]가 양산될 정도인데, 조선시대 사람에게 이게 얼마나 흥미진진했을지는 알 만하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자료를 접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삼국지 문화는 현대에 별로 전달되지 못했다. 후일 [[문체반정]]을 일으켰을 정도로 문체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정조(조선)|정조]]는 삼국지를 잡스러운 책이라며 자신은 삼국지(연의)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305005_001|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정조가 [[이순신]]을 칭찬하면서 '제갈공명과 싸워도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도 했다지만, 애시당초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고 그 때문에 촉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진짜 역사서만 보고 연의는 안 봤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역사서만 봤으면 '''절대 제갈량을 이순신과 동급에 놓을 수 없다.''' 차라리 류성룡 같은 문관이라면 모를까.][* 다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연의가 조선에 들어오기도 전인 문종 대에 문종과 수양대군이 병법을 논하며 문종이 "나는 제갈량에는 조금 못 미칠 듯 하다." 라며 자뻑을 했던 기록이 있다. 이미 연의가 나오기 전에도 군사적인 의미로 제갈량을 언급하는 게 아예 뜬금없는 일까진 아니었다는 뜻이다.(물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긴 했을 테지만) 애초에 연의도 당연히 저술할 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실제로 [[홍재전서]]를 보면 어떤 신하가 연의의 오로 침공전 에피소드와 제갈량 거문고 공성계를 얘기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이런 걸 보면 진짜로 안 봐서 지적을 못 한 걸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나머지 삼국지 언급은 대부분 진수의 [[삼국지(정사)]] 이야기로, 삼국지 위지 등의 역사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유구국]] 사람들이 표류해왔는데 배 안에 통속삼국지[[https://sillok.history.go.kr/id/kva_12106107_002|#]] 가 있더라는 기사도 있다. 근데 재밌는 부분은 삼국지연의는 정작 정조가 칭찬한 충무공 [[이순신]]이 애독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정조 임금은 이순신을 제갈량보다 높게 봤지만 정작 이순신은 자신을 제갈량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물론 사회상 겸손의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만 전술과 병기를 창안하고 군대를 조련하여 적과 맞서는 수준을 넘어 국가 전체의 운영을 혼자 도맡아 부국강병을 이뤄낸 제갈량이니만큼 그런 자리에까지 가보지도 못했던 이순신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중후반에 접어들었을 때(명량해전 직전) 이미 이순신은 조선을 먹여 살리는 거나 다름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은 육군에는 화약과 화포를 공급하고, 조정에는 종이와 소금을 공급했으며, 의병들도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했기에 포위당할 염려 없이 안정적으로 관군과 합류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운송을 뱃길로 하던 조선의 조세 운송로를 지켜내고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보급로를 새로 개척한 것도 조선 수군이었다. 이순신의 강대한 세력 아래 전라도는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박살나기 직전까지 일본군의 발 아래 밟히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순신이 남해와 서해 일대를 장악하면서 평안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간 고니시를 필두로 한 대부분의 일본군은 보급이 끊어지면서 퇴각해야만 했다. 시대도, 입장도 달랐던 만큼, 제갈공명과 이순신 간에 우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난중일기]]에도 가정본 삼국연의를 인용한 구절이 존재한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225893|#]] [[청성잡기]]에 따르면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절친한 벗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인정하여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상의하곤 하였다. 왜적이 침입하자 충무공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국사(國事)를 함께 도모하자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었기에 다만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충무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잘 읽으면 국사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충무공이 이 책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또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대략 임진왜란 7년 전쟁 막바지였던 무술년에 명나라 수군도독인 [[진린]]이 조선수군 수영에 온뒤 이순신의 인품에 감화된 일화 중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진린이 천문을 보니 장군성이 흔들렸기에, 이를 이순신 장군의 별이 흔들리는것으로 봐 다가올 [[노량해전|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위험에 대한 조짐이라며 이순신에게 [[제갈량|제갈무후]]의 고사를 들어[* 짐작했을 듯이 연의 속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중 북두칠성에 수명을 연장케 기도하는 대목이다.] 이순신에게도 기도를 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본인의 능력과 업적은 무후만도 못할진데 어찌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냐며 정중히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를 보면 알듯이 적어도 당시 [[이순신|충무공]] 또한 삼국지연의를 읽었고 삼국지 속 인물들이나 일화들을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진린도 '''충무공이 알아들을 거라 생각해서''' 제갈무후를 인용했다고 볼 수 있으니 명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삼국지연의가 꽤나 대중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유추하는 것도 가능하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집집마다 이 책이 있었고, 그 내용이 과거 시험 문제로 출제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20309/44657031/1|기사]] 일제시대에는 일본을 통해서도 삼국지가 들어왔고, 부산시민도서관에는 한글로 필사된 삼국지도 보존되어 있다. [[https://cms.dankook.ac.kr/widget/web/-oriental/-23?p_p_id=Bbs_WAR_bbsportlet&p_p_lifecycle=2&p_p_state=normal&p_p_mode=view&p_p_cacheability=cacheLevelPage&_Bbs_WAR_bbsportlet_extFileId=9977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