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연의 (문단 편집) === 촉을 옹호했는가? === 삼국지연의가 [[촉빠]] [[소설]]이라는 설은 아무튼 송대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는 [[촉한정통론]]이 대세였고, [[제갈량]]이나 [[관우]]는 유교적 충신의 모범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촉의 인물이 높게 평가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에 대해 일본의 동양사학자 가토 도루(加藤徹) 교수의 견해는 ‘남자’를 뜻하는 男(남), 漢(한), 士(사), 俠(협)의 예를 들며 男은 女의 상대로서 남자, 漢은 땀과 피를 흘리는 뜨거운 남자, 士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의 남자, 俠은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라면서, 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가 재미있는 것은 漢ㆍ士ㆍ俠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 최고의 ‘협’으로 유비를, 이상적인 ‘사’로 제갈공명을 꼽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인은 역사에서 미학(美學)을 찾는데, 천하쟁탈전에서 이기더라도 왕조의 수명은 얼마가지 않으나 역사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의(義)의 미학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비와 공명은 죽을 때까지 완고하게 자신의 미학에 얽매인 인물이었다. 유비는 촉(蜀) 땅에 웅거한 뒤에도 협(俠)의 용병 정신을 유지했고, 공명은 사대부로 사(士)의 미학을 관철시켰다. 유비와 공명은 최고의 협(俠)과 사(士)의 조합이었으며, 이는 후세만이 아니라 동시대 상대국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라는 대하드라마에서 이들이 주인공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연의 마지막 주인공이 강유인 점도 납득할 수 있다. 그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이자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일단 실제 역사서와 비교해 봤을 때 촉한의 인물들에게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업적을 부풀리는 대목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교의 기준을 정사에 맞춘다면 연의는 다분히 촉빠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이 사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을 원대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 단적으로 [[삼국지평화]]와 비교한다면 연의는 상당히 발전한 점이 많은 작품으로서 상대적으로 삼국시대의 세 세력을 균형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연의는 단순히 유관장 중심의 통속적인 영웅물이던 삼국지평화 수준을 뛰어넘어, [[군상극]]적인 특성을 가진 복합적이고 [[비극]]적 요소를 갖춘 '군웅물'로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지만 삼국지연의란 작품은 본래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써서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된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에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쓴 작품이다. 흔히 보이는 촉까들이나 '촉빠 나관중의 고의 왜곡' 같은 거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잊고 있는(혹은 아예 모르는)것. 누가 왜곡을 해서가 아니라 애당초 그 작품이 태어난 땅에서는 민심 자체가 늘 촉한 쪽에 기울어 있었다는 이야기, 당장 삼국지평화의 묘사를 보면 연의는 그 시대 작품치고 다른 세력을 굉장히 우대한 작품이다.[* 촉한정통론 문서에 보면 알겠지만 송대부터 청대까지 촉한정통론이 대세였으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원말 명초기는 관우가 황실에 의해 제왕으로 모셔지던 시기이다. 한마디로 현대에 와서 재해석론이 일기 전 청나라 시대까지는 중국 대다수가 촉빠 성향이었다. 당연히 중국인이 중국인들 보라고 쓴 소설 역시 이 성향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조위, 혹은 그 뒤를 이은 서진이 오래 갔다면 조위정통론이 자리잡았겠지만 서진이 금방 멸망하면서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중국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조조는 태조가 아니라 그냥 역적으로 캐릭터화된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이전과는 달리 [[조조]]를 "단순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인 악당"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연의의 조조는 군사적인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갖춘 영웅으로서의 외관을 갖추고 있으되, 내면적으론 형식적인 충심을 지녔으나 그 밑으로 끝없는 야망을 품고 있고, 의외로 인정 많은 면을 지녔으되 자신을 위해 타인을 서슴없이 희생시키는 잔혹함을 동시에 갖춘 대단히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조조는 이미 예전부터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정사 등에 표현된 그의 장점도 버리지 않고 표현했다. 조조가 죽는 장면을 보면 그의 과거의 악행의 응보를 받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조조 본인은 죽을 것 같자 신하들이 하늘에 제를 올려보자고 하자 "하늘이 정한 천명이니 제를 올려도 소용없다"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처첩들에게 스스로 살림을 해서 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조조가 죽고 난 뒤 삽입된 업중가에선 "지략도 뛰어나고 문장도 잘 짓고 부하들과도 사이가 좋고, 이만한 사람이 그냥 신하로만 있겠냐"고 얘기하고 무정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또 업중가의 마지막 구절은 죽은 사람 가지고 평하기 좋아하는 서생들을 "무덤 속에선 비웃는다"라고 얘기하며 끝난다. 즉, 단순 악역이라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보통 외면의 재능이 있으면 내면으로도 좋은 품성을 가지고, 외면이 찌질하면 내면도 찌질하기 마련인 고대 소설에서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물론 당시에는 "겉과 속이 다른 간웅"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컸겠지만, 이런 묘사는 "유교적 도덕성"에 둔감해진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조조의 평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삼국지평화]]에서는 같은 장면이라도 조조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게 한두 장면이 아닌데, 일례로 관우가 유비를 찾아 떠나려고 하자 조조는 관우를 계략을 써서 잡으려고 하고, 헌제의 아들을 길가에서 참수시키는 등 완전한 악역으로 등장했다. 관우가 떠나자 진정한 충신이니 잡지 말라면서 공문을 보내고, 마지막에 비단옷까지 내려주는 연의의 조조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또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조조를 제외한 위나라 인물은 지극히 비중이 적었다. 심지어 삼국지평화에서는 조조가 "나에게는 모사가 없다"라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다. 사실상 창작물의 세계에서 위나라의 신하들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왠지 [[장료]]가 모사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연의에서는 [[순욱]], [[곽가]] 등의 위나라 측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존재감을 주고 있다. [[오(삼국시대)|오]]의 경우도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단순히 손견이 잠시 출연하거나, 적벽대전에 이름을 올리거나, 관우의 죽음이나 이릉 전투에서 약간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연의에서는 오나라의 성립이나 멸망까지 잘 묘사하고 있다. 단, [[손권]] 말년의 [[이궁지쟁|후계자를 둘러싼 삽질]]과 [[손준|황실]][[손침|내부의 암투]]가 빠져버리고, 마지막 [[황제]] [[손호]]의 막장 행각도 대충 넘어가 실제 역사보다 나아 보이게 되었다. 아마도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강남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명대에 쓰여진 소설이라 같은 강남 기반의 오를 까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삼국지는 군담소설이다보니 대놓고 쌈박질하거나 메인 [[플롯]]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 만큼 굳이 다뤄야 할 필요를 못 느낀 나관중이 그냥 빼놓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를 보면 위나 오의 인물들이 명백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짤막하게나마 많다. 조조가 여포, 원소 등과 싸우는 부분이나, [[손책]]이 강동을 정벌하는 부분이나, 혹은 합비공방전 등이 그러하다. 이런 부분에서 위나 오의 인물들은 각자 용기와 지혜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는 부분을 보여주고 있어 그전의 삼국지평화와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조가 원씨 집안을 꺾고 하북을 재패하는 과정은 뒤로 갈수록 유비 3형제가 거의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 삼국지연의를 각색한 많은 작품들이 짧게 줄이거나 통으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삼국지연의는 이 싸움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면서 조조와 그 모사들의 지략과 휘하 맹장들의 활약에 상당한 묘사를 할애하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할 때 오의 승상 [[장제(손오)|장제]]는 “지금 만약 임금과 신하들이 전부 항복하고 국난에 죽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 역시 욕된 일이 아니겠소?”라고 하며 비장한 모습을 보인다. 즉, 주인공은 촉이되 다른 세력도 최소한 자신들의 에피소드에서만큼은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있다. [[유비]]의 경우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조]]에 버금가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군략에도 뒤지지 않는 효웅으로 평가받는 데 반하여 연의에서는 전장에서의 활약은 전부 [[관우]], [[장비]], [[조운]]이 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전략적인 면은 죄다 [[제갈량]]의 뛰어난 지혜덕인 것으로 바꿔 놓아, 아무 활약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는 제갈량이 기용되기 전의 승리조차 제갈량 기용 후로 슬그머니 옮겨 가며 공로를 빼앗겼다.[* 연의에서 제갈량의 첫 활약이었던 박망파 전투는 사실 유비의 작품이다. 유비가 복병을 설치해, 하루아침에 자기 병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나니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게 격파당했다.] 게다가 툭하면 울거나 신세 한탄이나 늘어 놓아, 현대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찌질이로 보일 지경이다. 거기다가 정사에서는 유비군도 적벽대전에 참전했고(연합군 병력도 유비군 2만, 손권군 3만으로 별로 밀리지도 않는다) 주유의 남군 공략도 도와줬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에선 [[적벽대전]]은 강 건너 불구경하다 퇴각하는 조조군 뒷치기나 하고, 남군은 주유가 부상 입으면서 필사적으로 싸워 조인을 몰아내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성만 낼름 먹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손권]]이 계속 형주 돌려달라고 하는 게 정사보다 연의가 더 정당성있어 보일 지경이다.[* 다만 작품 초반에는 유비가 지혜로운 모습을 보이는 부분이 꽤 많다. 황건적과 싸울 적에는 유비가 작전을 짜는 부분도 있으며, 서주 시절 조조의 견제를 받아 이호경식이나 구호탄랑 등의 계략에 당할 때도 오히려 유비는 조조와 순욱의 꾀를 꿰뚫어본다. 결국 계략에 빠진것도 조조가 황명을 이용하자 어쩔 수 없이 원술과 싸웠다가 여포의 뒷치기에 당한 것이며, 논영회 때 조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겁쟁이인 척하는 임기응변도 있다. 그러나 원소에게 의탁하고 여남에서 박살나 제갈량을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전과 같은 머리 쓰는 장면이 적다.] 사실 유비는 적벽 전후로 서서, 제갈량이나 방통, 법정 등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참모진들이 나타나 굳이 유비가 직접 전처럼 계략을 짜낼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참모진의 의견을 따르고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모범적인 군주상으로 탈바꿈한다. 결국엔 제갈량이란 캐릭터의 필요성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변모한 바가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나관중]]이 [[유교]]와 [[수호전]]의 영향을 받아, 유비를 무보다는 문에 치중하는 유학의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잡은 데다가, '스스로 나서기 보다는 호걸들을 조정하는 역'인 수호전의 [[송강]]과 비슷한 인물상으로 그리려 하다보니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 찌질하게 보이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수호전의 작가 [[시내암]]은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인덕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비의 묘사는 팔이 길고, 귓볼이 두툼한 등 부처의 81상과 닮은 모습을 제법 보인다. 그러나 인덕이 강조되었다고 하지만, 근대 이후 유비는 중국인들에게조차 무능하지만 음흉한 인물로 여겨지니[* 중국 속어 중에는 "유비가 아두를 땅에 던진 것은 인심을 매수하기 위해서"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강산을 차지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속담들은 연의의 유행 이후 등장한 것이다.], 이렇듯 유비의 묘사는 소설을 위해서 많이 달라진 감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정리하면, 유불도 삼교의 조화를 중심으로 한 중국 정서에서 보자면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군주는 [[요(삼황오제)|요]], [[순(삼황오제)|순]] 임금이다. 즉 '무위의 치'[* 물론 중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나 도교 단 하나만이 아닌 유불도 삼교를 모두 이해해야만 하며, 무위의 치 개념도 따라서 [[유교]]와 [[도교]] 양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도교적 해석의 무위의 치는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즉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를 말하고, 유교적 해석으로는 공자가 [[요순]]에 대해 평가했듯이 공손하게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어진이들을 불러 모으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요순 시대를 극찬하던 것도 [[공자]]이기도 하고 여기서의 무위의 치 개념은 도교라기보다는 유교적 개념에 가깝다. 다만 그렇다고 [[도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개념이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노자]]와 공자의 대화… 혹은 대화했다는 전설이라든가 초기 유교와 도교 개념들은 상당히 겹치는 것들이 많다.] 군주는 자비로움과 포용의 태도로 모두를 감싸안을 뿐 마구잡이로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의 유비는 능력과 결단성도 뛰어난 편이나 이러한 면들이 연의에서는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전대의 [[한고제]] 유방과도 상당히 비슷한 경우, 유방 역시 정치적인 능력, 식견, 인용술, 야심, 군사적인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초한지]] 등 창작물에서는 군림하지 않으며 한 발짝 뒤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들을 쓰는 모습만 강조되며 무능력하고 음흉해 보이는 것과 같은 경우다. 약간만 더 부연해 보자면 유비의 이런 캐릭터 정립은 시대가 지나면서 강고해진 촉한정통론이 유학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유비 일당과 제갈량이 맨주먹으로 시작해 명분과 실리를 다 쟁취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줄타기하고 싸운 면모는 슬쩍 묻히고 유능한 선비 출신 신하(->제갈량)와 인덕 있는 군주 유비라는 이상적인 군신 관계 위주로 부각되어 가면서 생긴 일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당대 이후로 최고의 재상이자 선비로서 치국의 근본을 안 인물이라며 사후에도 자국이나 적국에서나 칭송받은 인물이다. 당장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초대 군주 사마염부터가 '야, 제갈량만 한 신하 어디 없냐?'라고 했을 정도에 제갈량이 남긴 [[팔진도]]를 장수들에게 학습시키는 면모를 보였고 서진 시기부터 시작해 많은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데다가 제갈량이 애당초 출사한 과정이라는 거 자체가 재야에 묻혀있던 '선비'가 '이상적인 군주'의 인정을 받아 등용되어 여차하면 니가 왕 하란 식으로 '전적인 신임'을 받고, 마음껏 원 없이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펼치며 후대에도 명성을 날린다는 이상적인 얘기고[* 후대에 갈수록 관중 악의보다 거의 전설상의 인물들인 [[이윤]]과 [[여상]]에 제갈량이 자꾸 비유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전설적인 군주 탕왕의 재상 이윤이나 주문왕의 재상 여상도 이런 식으로 재야에 머물다가 덕망 있는 군주에게 등용된 케이스이기 때문. 제갈량은 여기에 더해서 선비로서 사심 없이 충심을 다해 왕으로부터 전권을 이임받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는 플러스 포인트도 추가된다.] 여기에 그렇잖아도 북벌을 하고 싶어 안달하던 송나라 이후 한족의 분위기까지(한국으로 따지면 병자호란 이후 사회 분위기) 영합하게 되면 선비들한텐 제갈량이야말로 꿈의 화신 같은 게 된다.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은 당대 관직 진출이 좌절된 선비들이 주로 쓰던 것이었고 때문에 더 나아가 제갈량은 선비의 사표 중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그를 등용한 군주의 캐릭터 해석도 유가적인 이상의 극치인 군주 중의 군주다운 뭔가가 필요해지는 것으로 유비의 캐릭터 정립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경향성은 현대 역사물에서도 자주 보인다. 왕조 시대의 인물이 뜬금없이 민주주의 정신의 설파자가 된다거나, 세종처럼 사대를 중히 여긴 조선 국왕들이 자주정신의 이름으로 중국에 한 방 먹이는 장면이라든지 등등. 민주주의니 자주민족 같은 현대 대중의 긍정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인공으로 밀어주는 긍정적인 인물에게 이식시킨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여기에 관우 신앙까지 겹쳐져서 '그 관우'가 섬겼던 유비라는 군주 자체가 더욱 이상화되는 과정은 덤이다. 단, [[나관중]]의 원작에 모종강 부자가 주석을 달면서 점차 친촉/반위적인 내용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관중]]의 관심이 "영웅 쟁패"였다면, 모종강 부자의 그것은 "권선징악"에 가까웠다.[* 본디 나관중본은 구전적 성격이 많이 남아있었고, 당연히 통속적인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위/촉/오의 구성이 비교적 평균적이라 어느 소속이든 슬기롭고 충성스러우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통속연의>이고, 아무튼 각 인물들이 멋있으면 그만이었다. 나관중본의 경우는 관우의 죽음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이를 [[적토마]]가 [[올가미]]에 걸려 넘어져 관우가 붙잡히고, 손권 앞에서 영웅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적 성격이 강하게 각색한 것은 모종강본이다.] 또한 [[루쉰]]이 정리한 [[http://beholderer.egloos.com/800998|차이점]]에 따르면 나관중 본은 촉에 불리하거나 덜 멋진 부분이 많다. 오랜 떡밥이던 "안량이 유비에게 관우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말을 걸려다가 살해당한다"는 것은 가정본중 마이너한 버전에서만 나오며 모종강본은 삭제되어있다. 또한 손부인이 유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자살하는 것은 모종강본에서 추가된 것이며 심지어 나관중본은 제갈첨이 등애에게 항복할까 망설이는 부분까지 있다. 한마디로 나관중은 촉의 인물들도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 등을 묘사했지만 모종강본에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촉이 되는 것이다. 모종강의 인지도가 나관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나관중이 자신과 관계없는 부분까지 욕먹는 것이다.[* 한편으론 모종강이라고 100% 촉을 쉴드 치진 않았다. 일례로 관우가 손권의 딸을 개의 딸 운운하며 모욕하는 장면에선 협평으로 그럼 유비는 그 개의 딸과 결혼한 거냐며 비판한다. 여기에 노숙이 유비 측이 익주를 먹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문서를 가지고 오자 주유는 이런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냐며 분노하는데, 여기서 “원래 문서란 믿을 게 못 된다. 형주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협평이 들어간다. 유비 측을 은근히 사기꾼처럼 볼 수도 있는 협평이다.] [[제갈량의 북벌]]도 촉이 크게 패한 건 1차 북벌 한 번밖에 없고 나머지 북벌에서 일어난 전투는 거의 다 이기거나 큰 피해없이 후퇴했는데 연의에선 진창에서 [[학소]]가 제갈량을 완벽히 발라버리고 사마의도 위수에서 한번 [[제갈량]]의 작전을 간파해 큰 피해를 입히는 걸로 바뀌었다. 정작 정사에서 진창 전투는 좀 찔러보다가 안 되니까 그냥 물러난 것에 가깝고 사마의는 전투로는 제갈량을 한 번도 못 이겼다.[* 다만 사마의의 전술적 패배가 그렇게 크진 않았고, 제갈량을 교전으로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해 요충지를 수비하는 전략을 취해 제갈량의 전략적 공세 목표(장안 공략)는 돈좌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상방곡 전투에서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서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넣는 등, 대승을 거두는 장면들도 대부분 연의의 창작이다.] 실제 제갈량과 사마의는 군대를 신중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다지 드라마틱한 전투 장면이 연출되지 않아서, 연의에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양측의 전공을 서로 부풀려 준 것이다. 또 연의에서 제갈량을 굉장히 천재적인 전술가로 묘사해 왔음에도 실제 제갈량의 북벌 전과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물론 이건 다 [[마속|망할 제자 놈]] 때문이긴 하다. 물론 그 제자를 기용한것도 사령관의 책임이니 제갈량이 책임을 피할수는 없다.], 사마의나 학소 등 위나라의 방어 사령관들도 만만치 않았다고 띄워주는 묘사를 넣어서 독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나관중 이전의 삼국지인 삼국지평화 같은 경우는 역사 왜곡을 하면서까지 결국엔 촉한의 후예가 승리한다고 억지 해피 엔딩을 만들었다.[*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된 유연의 아들 유총이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끝으로 정사를 참고하면서도 [[진나라]] 사관이었던 진수가 차마 건들 수 없었던 [[고평릉 사변|사마씨의 찬탈]]이나[* 서진의 후신인 동진의 [[진명제]]가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듣고는 "그게 사실이면 그 진나라가 오래 못 간 건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사마씨의 찬탈은 탈법의 정수였다. 그러니 진수가 그걸 그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기전체 사료의 특성인 뒤죽박죽한 부분들(예컨데 [[합비 공방전|합비전투]])을 나름대로 매끄럽게 정리함으로써 정사보다도 서술이 낫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도 없진 않다. 당대에 이런 민담 수준을 뛰어넘는 고퀄리티의 역사 소설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지경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