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연의/피해자 (문단 편집) === '''[[유우(삼국지)|유우]]''' ===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명군의 재목으로, 삼국지 초기 가장 유력한 군웅이었던 공손찬과 대립했고 원소는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고 싶어했다. 동탁 또한 그를 중앙의 고관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난세가 일어났음에도 평시와 다를 바 없는 곡물가를 유지해 정치 및 경제적으로 능력을 입증했고, 공손찬의 악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을 일으켰을 때에는 겨우 유주 하나 그것도 공손찬 때문에 절반 정도만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무려 10만의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우의 신하들 중 공손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자가 배신해서 공손찬과 내통하는 바람에 공손찬이 기습을 성공시켜 유우가 패망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공손찬이나 원소, 조조와 달리 이민족들에게도 신뢰와 존경을 받아 그가 다스리는 동안 이민족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공손찬에 의해 유우가 사망한 뒤에는 그의 신하와 군병들이 이민족들과 협력해서 복수를 명분으로 공손찬를 끈질기게 괴롭혀 결국 원소에게 패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원소보다 공손찬이 훨씬 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계교 전투에서 원소가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전까지 원소는 반격은 커녕 공손찬의 포위망에 갇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만 있었다. 이러한 공손찬 세력의 강성함은 연의에서도 그 흔적이 드러나는데, 도겸이 조조의 공세에 노출되어 각지로 사자를 보냈을 때, 그를 돕기 위해 움직인 군대는 유비뿐만이 아니라 공손찬의 원군도 함께였으며, 군병은 공손찬의 군병이 훨씬 더 많았다. 사실 이 때 유비는 독립적인 군벌이 아니라 공손찬의 수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본거지가 유주에 있는 공손찬이 원소의 본거지인 기주를 관통해 청주를 지나 서주까지 원군을 보낼 정도였으니 그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었는지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연의]]에서는 '''공손찬의 비중이 공기에 가깝게 변하면서 공손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유우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애시당초 유비가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벗어난 것도, 조운이 형의 장례를 위해 낙향하는 것도 실은 유우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 유비는 서주에 가 있다가 유우가 죽은 이후 공손찬에게 복귀하지 않고 눌러앉았고 조운이 형의 장례를 핑계로 낙향한 것도 비슷한 시점이다.] 다만 유우는 공손찬만을 잡고 주위에 피해가 가선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10만 대군이라는 것도 어중이 떠중이들만 모았는지 막상 공손찬의 수백명 무리가 기습하자 그냥 무너지고 만다. 이래서 그의 행동은 군주는 너그럽기만 해서는 안되고 그 너그러움을 잘 이용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인용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