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연의/피해자 (문단 편집) === [[유비]] === 능력 부분에서 많은 것이 폄하되었다. [[정사 삼국지|정사]]에서 그려지는 유비는 지용겸비의 효웅이다. 황실의 후손이라지만 사실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현장에서 부딪쳐가며 성장한 인물이었다. 군주로서 뛰어난 판단력과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었고,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으며[* 대표적인 예가 [[마속]]. 이건 [[삼국지연의|연의]]에도 언급되었다.] 전투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정사의 유비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이라고 할 정도로 유파에게 집착하여 유파를 어떻게든 데려오기 위해 혼자 동분서주했는데 유파에게 내정을 맡기자 촉한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된 것,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제갈량]]의 [[삼고초려]], 양의의 직위해제[* 양의는 위연 사후 자신이 승상에 오르지 못하자 비의 앞에서 '''위나라로 귀순할 걸'''이라고 외쳤다.] 등은 유비의 인재선발능력이 발군임을 입증해준다. [[삼국지연의|연의]]에서는 이런 모습 대신 인자하고 온화한 군자상의 인물로 묘사된다. 개인적인 전공은 모두 다른 인물들의 공(특히 [[제갈량]])으로 돌려지고[* 박망파 전투 등 [[유비]]가 직접 작전을 짜고 지휘했던 전투의 공을 [[제갈량]]에게 빼앗겼다. 적벽의 승전에선 패잔병 뒤치기나 하는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는 무제기에는 '공이 적벽에서 유비와 더불어 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비군 2만, 오군 3만 정도로 [[삼국지연의|연의]]의 묘사처럼 유비군 수가 적거나 약한 것도 아니었다. [[오(삼국시대)|오]]보다 적은 병력을 이끌고 있었던 이릉전의 패배가 75만을 끌고 가서 5만에게 털린 삽질로 바뀌었다.] 자신은 그저 큰 덕으로 백성과 부하들을 보듬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정사에서는 유비 자신이 직접 인재를 배치해서 전쟁에서는 승리를, 내정에서는 풍요로운 재정상태를 추구했음에도 연의에서는 그저 제갈량에게 의존하는 모습만 보였다. 스스로 독우를 매질하던 모습은 연의에서는 [[장비]]가 떠맡았다. ([[유비]]는 되레 말린다.)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는 우유부단함을 보이는 등 다른 군웅들의 호쾌한 모습과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나관중]]의 작중 의도, [[조조]]와의 대립구도 등을 살펴본다면 [[삼국지연의|연의]]가 단순히 [[유비]]를 깎아내리고 있지만은 않다. 먼저 [[삼국지연의|연의]]에서 재탄생된 유비의 '무위의 치'로서의 캐릭터는 [[한고제]] 시절부터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아온 친숙한 영웅상이다. 이런 인물상은 당시 군주들의 행동원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으로, 유비는 이를 취함으로써 여느 군웅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의를 저버린 세상에 있어 단 하나 남은 이상적인 군주'''가 되는 것이다. [[촉한|촉]]을 먹기를 염려한 것은 [[유장(삼국지)|유장]]이 종친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난세에서 살아남은 것이 조조와 반대의 행동을 했기 때문임을 알기에 조조와 똑같은 짓을 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해서다. 실제로 [[유비]]는 어진 정치를 폈기에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그가 구축한 집단도 이상하리만치 끈끈한 유대로 묶여 있었다. 실제로 적군의 처자를 인질로 잡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데리고 함께 피난가거나 [[서주#s-2|서주]]를 구원하러 갈 때 난민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또한 도둑질이 성행할 때 재물을 풀어 도둑질을 막는 걸 보면 호족들에게 비추어진 모습은 어떨진 몰라도 백성들에겐 좋은 사람으로 여겨진 듯하다.[* 서주의 호족인 미축은 한평생 유비를 지원했고 진등도 유비를 맘에 들어 했기에 호족들에게도 유비의 평가는 나쁘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인의를 강조했으되 강단있는 효웅의 모습인 반면 연의에서는 지나치게 인의만을 따르는 유약한 모습으로 묘사된 만큼 정사에서의 유비의 행적과 결합되는 부분에서는 이중성이 느껴지게 된다. 이는 [[여포]]의 유언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삼국지연의|연의]]에서는 여포가 먼저 배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여포를 용서하고 화해해서 오히려 여포를 감복시켜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뒤통수를 치는 식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여포의 배신 때문에 계속 사이가 안 좋았다면 단순히 여포 탓이라고 하면 그만이었겠지만, [[대인배]]스럽게 여포를 용서하는 묘사가 나오는 바람에 그런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은 여포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음흉한 수작이라고 해석할 여지를 만든 것. 게다가 그렇게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서 화해한 후 원술이 유비를 공격했을 때 여포가 기령과 유비를 불러 놓고 창의 가지를 화살로 쏘아서 유비를 구원하는 유명한 장면까지 나왔고, 그러다 유비가 다시 여포와 싸우게 된 것도 조조가 유비에게 여포를 공격하라고 포섭했을 때 유비가 동의한 서신이 여포 손에 들어갔기 때문인 것으로 나오니 결과적으로 유비가 대인배스러운 척 연기해서 여포를 속이고 이용해 먹다가 뒤통수를 치려던 수작이 들통난 형국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여포가 사로잡혔을 때 조조에게 여포를 죽여야 한다고 권하기까지 한 셈이라... 사실 여포의 유언 부분은 [[정사 삼국지|정사]]에서는 이중성과는 관련이 없는 장면이다. 그 외에도 백성에게 인기가 높은 모습도 별로 나타나지 않았고, 말과 행동이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정사에서 유비가 참수한 인물 외에 다른 인물들을 참수하는 경우도 많다. 연의에서 유비는 말년에 거의 살인광 수준으로 참수를 일삼았는데 대표적으로 [[부사인]], [[미방]], [[유봉]] 등을 참수했다.[* 살인광 살인으로 참수를 일삼았다고 한 건 뭐한 게 미방, 유봉, 부사인 이 세 인물 모두 다른 사람도 아닌 유비의 '''의형제 관우'''의 죽음에 직접적인 개입이 되어 있었다. 유봉의 경우는 그나마 변명의 구실이라도 있지만 미방, 부사인은 그 조차도 없다.] 하지만 이중에 실제로 죽은 건 유봉이 전부이며, 유봉은 형주 문제 및 후계구도 등의 이유로 제갈량이 유비에게 권해 자결을 명한 것. 그리고 미방과 사인은 죽기는 커녕 '''오나라에서 잘먹고 잘 살다가 천수를 모두 다 누렸다'''. 여하간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능력 부분을 약화시키고 인의를 강조시킨 것이 "우유부단 찐따"로, 찌질하게만 보이는 역작용이 되었으며, 이렇게 능력치를 희생시켜 가면서 부여한 인의 이미지는 후세에 와서는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되어 오히려 음흉한 위선자라는 인상만 남기게 되었다. "유비의 후덕함을 나타내려 하였으나 오히려 위선자처럼 되었다." 는 [[루쉰]]의 평가가 좋은 예시. 당대의 다른 소설들도 [[삼국지연의|연의]]의 [[유비]]와 비슷한 유형을 가진 주인공이 많다. [[송강]], [[삼장법사#s-2|삼장법사]] 등이 그러한데 부하들의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주인공 캐릭터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드라마 [[삼국(드라마)|삼국]]의 경우, 유비의 캐릭터를 재조명하자 [[관우]], [[장비]]의 캐릭터가 묻혀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부분으로 인해 어느 정도 피해를 본 부분도 있는 반면 수혜를 입은 부분도 분명히 존재하는지라 [[삼국지연의/수혜자]] 항목에도 유비가 들어가 있을 정도이다. 물론 그 쪽에서도 애매한 경우에 들어가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