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연의/피해자 (문단 편집) === [[왕랑(삼국지)|왕랑]] === [[제갈량]]에게 편지 한 번 보냈다가[* [[정사 삼국지|정사]]에 따르면 왕랑과 [[진군#s-2|진군]] 등은 제갈량에게 "천하의 평안을 위해 [[위(삼국시대)|위]]에 귀순하는 게 어떠냐."는 편지를 보내지만 '''제갈량은 끝내 답변하지 않고''' 단지 "정의(正議, 옳은 것을 논함)"라는 글을 지어 반박을 한다. 이것은 제갈량의 문집인 <제갈량집>을 통해 전해진다. 이렇게 보면 제갈량 입장에서는 적절하게 [[병먹금]]을 한 셈이지만 [[촉한|촉]]팬 입장에서 왕랑은 한마디로 '괘씸한 놈'이 되었다.] 작가에게 찍혀서 인격 자체가 바뀐 경우다. [[삼국지연의|연의]]에서의 왕랑의 이미지란 [[손책]]한테 깨진 후[* [[엄백호|동오의 덕왕]]을 돕다가 [[손책]]에게 털렸다. 이때 [[우번]]이 왕랑의 수하에 있다가 손책 편으로 건너갔다.]에 그저 존재감을 상실했다가 늘그막에 재등장하여 북벌 온 제갈량에게 "말싸움"을 신청했다가 그저 자폭[* 기세 좋게 "우리 군사(위군)가 대단하니, 너네(촉군)들은 항복하는 것이 하늘의 순리여."라고 선빵을 날렸는데, 제갈량은 이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맞섰다. 즉 "'''그건 상관없고, 넌 하는 짓이 왜 그러냐?'''"라며 왕랑의 일생을 꾸짖어서([[후한#s-1|한나라]] 시절에 효렴(추천을 받아 관직 임명)이 되고도 왜 역적 조조를 섬겼나는 식), 왕랑이 할 말을 잃고 화병으로 사망했다.]하고는 죽어버리는 평생 발리는 인생으로 나온다. 앞에서 말했지만 사실 존재감 자체가 없으며, 손책에게 깨진 왕랑과 제갈량에게 죽은 왕랑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몇 번 더 나와 봤자 '[[조조]] 휘하의 어용 지식인 1' 정도의 존재로 아부를 떨거나 [[헌제]]를 협박하는 잔챙이 악역이나 맡는다. 김홍신 평역판 삼국지에는 [[화흠]]의 눈짓을 알아채고 헌제의 '''멱살을 잡고 윽박지른다'''. 물론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왕랑이 사마의와 사돈이라는 점도 괘씸죄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대의 태위 양사의 제자이자, 경전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잠시 [[도겸(삼국지)|도겸]] 밑에 머물렀으나 곧 회계태수로 부임했다. [[손책]]에게 패하여 달아난 것은 맞으나 연의 같은 자존심만 남은 골목대장이라서 맞선 것이 아니라, '''한실의 신료로서 임지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는 의지 때문에 맞섰다. 이후 잠시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손책에게 포로로 잡혔다. 기록에 따르면 "손책은 왕랑이 교양이 있고 곧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문책만 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왕랑은 비록 유랑과 곤궁한 생활을 하여 아침에도 그날 저녁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였음에도 친척과 친구를 포용하여 위로하고, 가진 것이 많든 적든 항상 나누어 도의에 바탕을 둔 행동이 매우 빛났다"고 되어 있다. 이후 조조가 초빙하여 수 년간 산 넘고 물 건넌 끝에 간신히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비슷한 직위에 있던 [[종요]]와 비교했을 때, 종요는 깐깐한 원리원칙주의자로 명성이 있었다면, 왕랑은 가능하면 죄를 적게 주고 융통성 있는 너그러운 인물로 통했다.[* 다만, 종요가 사형제를 반대했을 때(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시대를 앞선 것이다.) 이것을 까서(즉 반대) 사형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한 적이 있다. 근데 이게 그럴만도 한 게, 그 대신에 종요가 제안한 형벌이 발뒤꿈치를 자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 벼슬을 사공과 사도를 지냈으며 낙양의 자택에서 천수를 누리고 228년에 사망했다. 자식이 열후에 봉해졌을 정도였다.[* 서진에서 일족이 영화를 누린 만큼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연의에서의 모습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손녀는 [[사마소]]의 아내이기도 한 [[왕원희]]인데, 왕원희 개인은 지혜로웠지만 남편인 사마소가 촉 멸망에 많은 역할을 한 인물이고, 왕원희와 사마소 사이에서 태어난 [[사마염]]은 개노답. 시아버지 사마의는 단순히 제갈량의 숙적 차원을 넘어 사변을 일으켜 권신이 되고, 공손연 토벌 때 15세 이상 남자 7천명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해골을 쌓아 [[경관|전승 기념비]]까지 만드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후손조차도 훗날 이를 알고 진이 이래서 오래 못 간 거라고 탄식했을 정도다.) [[왕숙]]은 학식이 대단한 경학자였지만 경전을 위조한 적이 있고, 사치의 대명사인 [[왕개]]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돈을 잘못 두고 손녀를 제외한 못난 자식들 몫까지 덤터기를 쓴 거나 마찬가지다. 다만, 왕랑 자신이 한실의 신료 타령을 할 때는 언제고 한실을 빼앗은 위의 신하로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갔다며 나관중에게 트집잡힐 구석이 있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해가 바로 1차 북벌이 있던 해였기에 [[나관중]]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촉한]] 띄우기에 왕랑을 써먹었던 것이다. 어쨌든 결국 연의에선 손책과 제갈량에게 '''두 번 죽은 셈'''이 되어 버렸다. 연의에선 '''칼춤을 추며 태사자와 맞짱을 떴다'''는 구절에다가 한 나라의 중신이란 인간이 또한 산적떼 두목인 '''[[엄백호]]와 친구'''라는 괴이한 동인설정까지 붙어 버려서 도대체 뭐 하는지 알 수 없는 수상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