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육서울병원 (문단 편집) == 역사 == 1908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소속의 의사이자 선교사인 노설(Riley Russel)이 평안남도 순안에서 진료소를 개설, 진료소가 규모가 커지면서 '순안병원'이 된 것이 시초이다. 서울에 자리잡게 된 것은 1929년에 병원장으로 부임한 류제한(柳濟漢 George H. Rue) 박사의 덕택인데, 1931년에 [[소공동|하세가와마치(장곡천정, 長谷川町)]] 116, 경성빌딩 내에 진료소를 설치한 것이다. 진료소 규모가 협소하여 1933년에 [[인사동(종로구)|인사정(仁沙町)]]으로 확장 이전했다가 1933년에 현재 부지인 [[휘경동|휘경정(徽慶町)]] 산6번지(휘경2동 29-1) 일대 82만평 부지를 매입,1936년 2월에 경성요양병원으로 규모를 확대 개업했고, 동년 6월 15일에는 당시 화폐로 공사비 8만원을 들여 3층 양옥의 본관[* 현재 삼육서울병원의 산후조리원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1936년 완공된 경성요양원 본관이었다.]을 완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동아일보 1936년 6월 10일자 기사][* 이병훈, 이광수의 『사랑』과 일제시대 근대병원의 역사적 기록, 2016.] 본관을 낙성하면서 [[삼육보건대학교|경성요양원 부속 간호양성소]]도 함께 설립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볼때 이미 1933년 인사동 시절부터 [[X선|X-레이]] 촬영 장비까지 갖춘 의료기관이었으며, [[종로1.2.3.4가동|낙원정]]에 출장소가 있었고 빈민 환자는 무료로 진료를 봐 주기도 했다고 한다. 1935년 11월 10일 잡지 삼천리에 실린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_0520_0240|경성요양병원 관광기]]에 따르면 동경 위생병원이나 봉천 요양병원, 상해 요양병원 등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 세계 각국에 60여 개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20세기 중반에는 해외 비자 신체검사가 가능한 유이한 병원이었다.[* 다른 하나는 [[세브란스병원]]] 동 교단이 1929년에 개원한 [[https://www.tokyoeisei.com/|도쿄위생병원(東京衛生病院)]]의 명칭을 따라 1946년에는 경성요양병원(京城療養病院)에서 '''서울위생병원'''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50대 이상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도들, 그리고 일부 고령층 택시기사들은 삼육서울병원이라는 현재의 명칭보다 여전히 '''청량리 위생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다. 경성요양원 시절부터 일제강점기나 해방전후에 손꼽히는 의료시설이었는데, [[홍난파]]가 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고, [[이광수(소설가)|춘원 이광수]]의 소설인 '사랑'의 배경이 되는 결핵요양원(병원)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949년에는 류제한 병원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가 되면서 서울위생병원은 1960년대까지 최고의 의료시설이었다. 병원 구내에 이승만 대통령이 심은 기념식수가 아직도 자리잡고 있고, [[피천득]] 시인은 자신의 시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서 자신의 안락한 노년생활을 위해 청량리에 있는 위생병원에 입원하고 싶다는 선망을 표하기도 했다. 2009년 1월 1일부터 현재의 명칭인 '삼육서울병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