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종신기 (문단 편집) === 검새와 거울 === 일본에서는 검과 곡옥은 따로 검새(剣璽)라고 묶어 관리한다. 검새(劍璽)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여기서 새(璽)라는 한자는 임금 등이 문서에 날인할 때 사용하는 [[도장(도구)|도장]]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사기(역사책)|사기]](史記)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한고조]] 유방이 아직 나라를 세우지 못했을 때 거대한 백사(白蛇)가 길 한복판에 누워 있자 칼(劍)을 빼어 죽였다. 유방의 뒤를 따라오던 사람들은 뱀이 죽은 자리에서 우는 어느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보자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자식인데 적제(赤帝)의 아들을 만나 참살되었소." 하고 대답했다. 또한 기원전 206년 [[진(영성)|진나라]] [[영자영|자영]]은 유방에게 항복할 적에 [[전국옥새]]를 바쳤다. 이후로 [[한나라]] 황실은 유방이 백사를 베었다는 검과 [[전국옥새]]를 신물로 여겨 매우 소중하게 보관했는데, 여기서 검새(劍璽) 또는 새검(璽劍)은 한문 고서에서 황제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일본은 이 관용어를 자기네 상황에 맞추어 검(剣)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새(璽)는 곡옥 [[야사카니노마가타마]]란 뜻으로 사용한다. 전국옥새든 야사카니노마가타마든 모두 '''옥(玉)'''으로 만들었으니 용도야 달라도 아무튼 비슷하다고 간주한 모양. 검새는 늘 천황의 곁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천황의 침실 한편을 따로 꾸며 검새의 방(剣璽の間)이라고 부르고 거기에서 검의 복제품과 곡옥의 원본을 보관한다. [[1869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사실상 천도한 이래 [[1947년]]까지 따로 검새동좌(剣璽動座), 일본어로는 켄지도자(けんじどうざ)라는 직책을 두었다. 천황이 [[고쿄]]를 하루 이상 비우고 길을 떠날 경우에는 검새동좌 직분을 맡은 이가 '검새의 방'에 있는 검의 복제품과 곡옥의 원본을 모시고 같이 다녔다. 검새동좌 제도는 패전 이후 [[GHQ]] 시절이던 1947년에 사라졌으나, 1974년 11월 [[쇼와 천황]]이 [[이세 신궁]]을 참배할 적에 부활했다. 그래서 천황이 공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차량이나 기차에는 따로 검새를 넣은 상자를 안치하는 공간을 갖춘다고 한다. 한편 거울의 복제품은 같이 모시지 않고 따로 궁중삼전(宮中三殿)의 중심건물인 현소(賢所, 카시토코로)에 봉안했다. '검새'란 표현에 거울을 욱여넣을 수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종교적 관점에서 신성한 것은 위험하기에 거처로부터 분리하여 따로 모셨을 수도 있다. 신성한 것은 또한 위험하다는 관념은 동서고금에 흔하다. 신성한 것은 부정을 타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하고, 만약 잘못하여 부정을 타기라도 하면 화를 입는다고 여겼다. 정말로 너무나 신성한 무엇이 있다면, 사람들이 쉬 오가거나 먹고 자는 곳에 두는 것은 자칫 부정타기 쉬우므로 위험하다. 신성한 물건을 신전 같은 별개의 건물 안에 모시거나 또는 금역을 지정함은 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목적도 있지만, 또한 신성을 속세로부터 분리하여 행여 부정을 타 재앙이 일어나지 않게 안전장치를 씌운다는 의도도 어느정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