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삽교천 (문단 편집)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삽교천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서 에른스트 오페르트 일당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소재)를 도굴하기 위한 침투 경로로 활용되었다. 삽교천 또한 서해로 흘러가는 강 답게 썰물 때는 강물 수위가 크게 낮아지고 [[갯벌|펄]]이 드러나는 특성[* 강 하구에 방조제나 하구둑이 없는 강의 하류 지역은 바닷물이 강을 따라 역류하기 때문에 강과 바다의 중간적인 성질을 가진다. 강과 바다의 중간 성질이 있는 지역을 [[기수]](汽水)지역이라고 하는데 [[금강]], [[영산강]], [[낙동강]]의 하류 지역도 [[하구둑]]을 건설하기 전에는 기수지역이었으며, [[한강]]도 [[김포대교]] 옆에 설치된 수중보(水中洑)의 하류 지역은 기수지역이다.]이 있어서 밀물이 끝나기 전에 선박이 바다로 나아가지 않으면 꼼짝없이 펄밭에 갇히게 되므로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조선 후기에 사대부가의 묘는 관 주변에 현대의 [[콘크리트]]와 비슷한 회반죽으로 덮어버리는 [[회곽묘]] 양식인 경우가 많은데 오페르트는 회곽묘의 존재를 알지 못해서 단단한 회벽층을 깰 수 있는 장비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굴 시도에 실패했다. 오페르트는 당시 도굴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이 두꺼운 회벽을 깨지 못하자 관 주변에 마치 철판을 깔아놓은 것 같다고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회곽묘의 두껍고 단단하게 굳은 회벽층은 곡괭이로 깨는 것이 매우 어려우며 현대에는 회곽묘 출토를 위해 [[착암기]] 헤드가 장착된 [[굴착기]]가 동원된다.[[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710181512011|#]]]한 오페르트 일당은 썰물이 되기 전에 배를 타고 서해상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