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나라 (문단 편집) == [[인신공양]] == >정사일에 점을 친다. 장차 불로 지내는 제사를 하(河, [[황하]])에 지내려는데, 우리에서 기른 소와 첩을 강물에 빠뜨릴까?(丁巳卜:其燎于河, 牢沈妾?) >---- >《갑골문합집》 32161[* 이해 편의상, 갑골문 원문을 한자로 치환해서 적었으며 해석은 상명대 중국어 문학과 김경일 교수의 것을 참조했다. 다른 인용문도 같다.] >병술일에 점을 치며 정인 대가 묻는다. 특정 사안을 고하며 포로를 바치는 제사를 하(河)에 지낼 때 불로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소 세 마리를 황하에 빠뜨릴까?(丙戌卜, 大貞: 告執于河燎, 沈三牛?) >---- >《갑골문합집》 22594 >갑자일에 점을 치면서 묻는다.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에 주술사(巫)를 쓸까?(甲子卜,㱿貞:妥以巫) >---- >《갑골문합집》 5658 >묻는다. 오늘 병술일에 재라는 주술사를 불로 태우면 큰 비가 있을까?(貞: 今丙戌燎□[* 女와 才가 붙은 글자인데, 일단은 임시로 '재'라 읽었다.], 有從雨?) >---- >《갑골문합집》 9177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4472211245_9211423faa_b.jpg|width=500]] 성을 쌓으면서 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사람은 [[귀족]] [[무사(역사)|무사]]이고 뒤쪽의 [[도끼]]를 든 사람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다. 머리를 풀고 윗옷이 벗겨진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 상나라는 인신공양으로 유명하지만, 상나라뿐만 아니라 고대에 인신공양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청동기 시대 정복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포로들을 잡기 시작했고, 인신공양 풍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노예제가 확대되고 포로들을 노동력으로 인식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다만 수년 전 작고한 미국의 갑골 연구자 키틀리에 따르면 상나라에는 유물론자들이 소위 고대 노예제 사회라고 하며 자주 쓰는 서구권의 노예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상나라와 동시대였던 중동에서도 여러 인신공양 기록이 남아 있고[* 성서에 나오는 [[바알]]신은 유아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 ], 유럽의 [[바이킹]]은 중세 중기까지 인신공양을 행했으며, 고대의 생산력에 머무르던 남미에서는 15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올 때까지도 이런 풍습이 남아 있었다. 상나라가 인신공양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바로 상나라 시대부터 자세한 기록문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상서(尙書)'에는 '오직 상나라의 선인들만이 전(典)이 있고, 책(冊)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중국 최초의 역사 기록이 상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이는 갑골문의 형태로 갑골문자는 한자(漢字)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나라에서 약해졌다지만 주나라 시기의 인신공양도 만만치 않았다. 인신공양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인신공양을 본격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한 건 춘추전국시대 유가(儒家)가 발흥하면서 부터의 일이다. 상나라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춘추전국시대]] [[송(춘추전국시대)|송(宋)]]나라이다. 그래서 주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송나라에서도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 다만 인신공양은 점차 사람이 아닌 소나 말로 대체되어 갔다. 상나라의 인신공양 제물로는 노예들이나 유목민들인 [[강족|강(羌)족]]이 주된 희생양이었다. 상나라에서의 [[인신공양]] 내용과 방법은 [[갑골 문자|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갑골문의 기록을 볼 때 농사가 안 되거나 천재지변이 벌어지면 주술사를 제물로 썼다고 한다.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신공양을 했다. 신정일치(神政一治) 국가였던 상나라에서 [[인신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 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나 되었다. [[십이지]]의 하나인 묘([[卯]])자가 형벌의 한 종류로 쓰이기도 했다. 한자의 모양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제물로 삼기 위해 세로로 두토막을 내는 방법으로,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을 정형할 때 모습을 상상하면 편할 것이다. 갑골문 기록 중에 '사로잡은 적국의 고위 여성을 이렇게 죽일까?' 하고 점치는 기록이 있다. 한자 피 혈(血) 역시 그 형상이 제기([[皿]])에 담긴 사람의 피를 나타낸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 주왕 [[제신]]이 [[포락지형]] 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이다.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채택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고 했는데,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어 《사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포락 정도의 혹형은 실제 고고학과 갑골문을 통해 밝혀진 상나라의 많고 많은 잔악한 짓들의 일람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신공양에 처해지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 꿇린 뒤 밧줄로 묶었다.[* 이를 묘사한 인형도 발굴되고 있다.]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툭하면 제물로 바치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 문자로 눈([[目]])에다가 칼을 쑤셔 박는 모양을 뜻한다고 한다. 즉 민([[民]])의 기원은 매우 잔인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인([[人]])은 지배층만을 향해 말하는 개념이었으니, 저 시대에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방식으로도 인신공양을 했는지 붉을 적([[赤]])은 사람 모양 아래 불 모양이 있는 형태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모습으로 만들어 졌다.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게 아니라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다. 이를 두고 '죽어서도 생각을 못하고 명령에 순종하며 부림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생각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보았지 머리라고 보지는 않았기에, 무덤 주인의 혼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치 실제 사람들이 건강을 챙긴다고 각종 보양식을 먹는 것처럼 영혼의 보양식 개념으로 순장한 것이라고. 어쨌든 이 잘린 머리들은 뼈 공장으로 보내져 뼈 그릇를 만드는 데 쓰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은 윗부분이 톱 같은 도구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게다가 인신공양 제사의 흔적으로, 발굴된 청동 솥 안에 삶긴 사람 머리가 있었다. 결국은 상나라가 멸망한 주요한 원인들 중에는 제후국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했던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의 대상이기도 했던 주변 제후국들이 같은 제후국인 [[주나라]] 편을 들었던 것도 있는 듯하다.[* 이를 주도했다고 전하는 사람이 바로 주무왕 희발의 동생인 주공 희단([[주공단]])이다. 그래서 그는 유가에서는 성인으로 모셔지고 있고, 공자도 그를 본받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교화하려고 했다.] [[주나라]]는 상나라에 비해서 잔인성이 약해졌지만, 인신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 [[공자]]와 유가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인신공양의 풍습을 철폐했다는 기록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유가에서 '괴력난신을 멀리해야 한다'란 말이 나온 이유. 바꿔 말하면 많은 지방에서 여전히 인신공양이 계속되었던 것이다.]을 받는 가운데 차츰 줄어들다가[* 대표적으로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송양공|송나라 양공]]. 그 외에 [[춘추오패]]에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받는 [[진목공|진나라 목공]]도 죽으면서 신하들을 같이 끌고 들어갔다.] [[진(통일왕조)|통일 진나라]]에 접어들면서 대체로 사라지고, 청나라 중기에서야 완전히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