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대등 (문단 편집) == 역사 == 상대등 이전에 대등(大等)이란 관직이 존재했는데, 주와 군에 파견된 행사대등, [[소경]]의 장관인 사대등, 중앙정치기구의 차관인 전대등 등으로 분화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법흥왕]] 때(531년) 처음으로 [[철부]]가 상대등으로 임명되어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왕이 직접 주재했던 [[화백회의]]를 대신해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적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없는 상황이 닥치면 상대등은 왕위를 계승할 후보 우선순위로 여겨지기도 했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 합의제로 신라 성립 초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왕권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 심지어 특정 왕([[진지왕]])마저 [[폐위]]시킬 수 있었을 만큼 권한이 막강했다. 이런 화백회의의 장(長)이 상대등이다. [[진흥왕]]시기인 [[단양 신라 적성비]](赤城碑)에는 "대중등大衆等"이란 이름이 보이고 있으며, 그후에 만들어진 [[진흥왕 순수비]] 또는 [[삼국사기]]에는 비슷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는 7(또는 8)명의 대등이 보이고 있고, [[창녕비]]에는 20(또는 21)명의 대등이 나타나고 있다. [[선덕여왕]] 때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비담의 난]]) 오히려 털리고 [[김춘추]]는 화백회의를 장악한다. [[성골]] 국왕세력과 상대등의 충돌, 그리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이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성골 국왕과 상대등의 [[권위]]는 동반 하락했고, 김춘추 세력이 사실상 [[실권]]을 잡는다. [[진덕여왕]]을 거쳐[* 진덕여왕 시대에 이미 최고 실권자는 김춘추였다.] 결국 김춘추가 [[진골]] 중 가장 우위임을 인정받아 왕에 오른다. 원래 [[진덕여왕]] 사후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알천이 스스로 사양했는데 이는 상대등의 몰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김춘추가 [[권력]]을 잡은 [[진덕여왕]]대부터 중국식 정치제도의 수용을 통해 국왕 중심의 [[관료제]]를 강화하면서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 권력이 약해졌고, 중대 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면서 중대 왕권이 귀족회의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이전 시대와 달리 상대등이 국왕 견제가 아니라 역으로 왕권을 보좌하는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때로는 타협책으로 귀족세력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실세 귀족을 상대등에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미 김춘추-김유신계가 권력을 장악하였음에도 김춘추 즉위 후 김유신보다 먼저 상대등이 된 금강이나[* 김춘추 다음가는 2인자이자 정권 실세인 김유신도 무열왕 7년인 660년에야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680년(문무왕 20년)에 상대등에 오른 [[김군관]]이 그러한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등이 전제왕권에 방해물이 된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숙청당하기도 했는데,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란에 직접 연루된 것도 아닌 전직 상대등 김군관을 비롯한 진골 귀족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 그 예다. 이렇게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상대등의 권력도 한동안 물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대신 왕을 보좌하며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인 [[시중]]의 권한이 막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제왕권이 약화되는 중대 후기에는 상대등의 비판적 기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경덕왕]] 15년(751) 상대등 [[김사인]]이, [[혜공왕]] 13년(777) 상대등 [[김양상]]이 정치상황을 비판한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왕권이 약해진 하대에 들어서 상대등은 다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이 상대등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해서 왕위에 올랐고, 이후로도 상대등 역임자가 왕위에 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상대등은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상대등의 지위를 이용해 [[찬탈]]을 시도하는 경우도 생기고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물론 왕이 되고 나면 자기 자리를 뺏기면 안 되니까 가능하면 가까운 친인척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왕족]] 사이에서도 작은 집안끼리 분파를 이루는 원인이 되었고 피튀기는 하대 왕위쟁탈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