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록수(소설) (문단 편집) == 기타 ==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대표작인 [[무정(소설)|무정]]과 비교되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무정이 지나치게 설교조인데 반해 상록수는 브나로드 운동과 주인공들의 애정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소설로서의 성과가 높다. 읽다 보면 한밤중 해변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키스를 나누는 등 로맨틱--오글오글--한 장면도 나온다. 채영신이 동혁과 약혼하는 해변의 장면에서 영신이 계몽사업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사는 미국 여성 '미스 빌링스'를 거론하고 동혁이 일언지하에 '공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대화, 후반부에 이르러 영신이 깊이 고민하며 동혁과 결혼한다면 '부엌구석'에 갇혀 농촌사업은 영원히 포기하게 될것을 깨닫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독백도 있다. 이 대목들은 채영신 시대에서 100여년이 흐른 지금에조차 여성들이 결혼, 출산과 동시에 경력단절의 늪으로 빠지는 상황에서 시사점이 있다. 실은 해변에서의 약혼이란 것도, 동혁이 결혼을 '사랑하니까 마땅히 하는 것'으로 아무 고민 없이 생각하는 데 반해 영신은 자신의 사업에 미칠 영향 때문에 끝내 갈등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일단 3년이라는 약혼기간에 어떻게든 사업을 궤도에 올리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식으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고, 결국 영신은 파혼을 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된다면 교과서 지문만 읽지 말고 전문을 정주행하기를 권한다. 길이도 얼마 안된다. 해당 작품의 무대가 된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 지역에는 이 소설을 기려 이름이 결정된 [[상록수역]]이 있으며, [[안산시]] 2개 구로 분할됐을 때에도 본오동이 위치한 동부의 구 이름을 [[상록구]]로 지정하였다. 근현대 문학작품에서 유래한 지명은 국내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 지역 명칭에는 상록수 또는 이 소설의 모델이 된 최용신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은데, 상록수역 앞 길 이름이 상록수로이며, 상록수역 사거리를 거쳐 본오동, 사동, 해양동을 거쳐가는 도로 이름이 딴 용신로다. 그 이외에도 본오동과 사동을 잇는 구 [[수인선(협궤)|수인선]] 구간의 고가교 이름 역시 상록수 아니면 용신x교 형식으로 붙어 있다. || [[파일:/image/028/2007/04/03/04048829_20070404.jpg]] || ||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崔容信, 1909~1935)의 사진 || 여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는데, 옛 [[안산시]] 지역에서 [[농촌]]계몽 운동을 펼치다 25세에 죽은 [[최용신]]이 그 주인공이다.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http://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thisPage=1&bbIdx=8701&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에서 최창희(崔昌熙)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이후 [[함경남도]] [[원산시]]의 루시[[여자고등보통학교]][*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 교명은 학교에 건축 기금을 기부한 미국인 선교사 Lucy Armfield Cuninggim의 이름에서 딴 것.]를 거쳐 협성여자신학교[* 現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진학했다. 독실한 [[개신교]]([[감리회]]) 신자였던 그녀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농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재학 중에도 농촌운동에 참가하여 경험을 쌓았고, 1931년에는 [[YWCA]]의 파견교사로 샘골(안산)에서 농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남주인공 박동혁 역시 심훈의 조카인 실존 인물 [[심재영(1912)|심재영]]에서 유래했다. 그는 경성공립농업학교([[서울시립대]] 전신)를 나와서 문맹퇴치운동에 헌신했다. 경농에 입학한 이유도 심훈 선생에 영향이 컸는데, 심훈이 ‘농업학교를 나와서 농업과 농촌사회을 위해 일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한 것을 듣고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충남 당진에 가면 [[심훈]]의 기념관과 심재영 씨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심훈은 당진에 내려가 심재영의 집에서 작품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이주한 필경사도 심재영의 고택 인근이다. 현재 심재영 고택은 후손에 의해 관리중이다.] 당시 농촌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최용신은 부모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왔다. 또한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고, 수예, 재봉, 가사 등 실용적인 기술들도 가르쳤다. 그녀의 노력 덕에 농촌은 점점 더 개선되고 발전되었고, 가난과 무지 속에 살던 농촌 주민들은 계몽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이 나오던 해인 1935년, 최용신은 과로로 인하여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활동하던 샘골강습소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최용신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 처음엔 인근의 일리 공동묘지(현 뉴라성호텔 자리)에 매장했으나 안산시에 공단과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김학준이 죽고나서인 1975년 6월 9일 현 위치로 이장했다. 최용신은 혼인을 하지 않아서 후손은 없으며, 약혼자였던 김학준 씨가 샘골강습소의 후신인 샘골고등농민학원의 이사로 활동하며 묘지를 관리하고 추모 사업을 진행했다. 두 사람은 김학준의 일본 유학이 끝나면 정식으로 혼인하려 했지만, 미처 끝나기도 전에 최용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한 것. 김학준은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1975년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으로 최용신 옆에 묻어달라고 하여서 김학준의 묘 역시 최용신의 묘 옆에 있다. 현대에는 안산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최용신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최용신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은 그녀와 함께 농촌계몽 활동을 했던 [[류달영]](1911-2004)이 상록수 소설이 유명해지면서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그녀의 전기에 의존하고 있다. [[분류:1935년 소설]][[분류:한국 소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