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앙 (문단 편집) == 몰락과 최후 == 진효공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상앙은 다른 이의 소개로 조량이라는 숨은 현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상앙이 조량에게 직언해줄 것을 부탁하자, 조량은 [[진목공]] 때의 명재상 백리해와 상앙을 비교해 말했다. >오고대부 [[백리해]]가 나라를 다스릴 때 어진 정치를 펼쳐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세운 제도는 도리를 등지고 당신이 고친 국법은 이치에 어긋나니 이를 교화라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극형으로 사람을 다스리니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아놓았습니다. 백리해가 나라를 순시할 때 무장한 호위병을 동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당신은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십 대의 수레가 없으면 외출조차 하려 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처지가 이토록 위태로운 데도 더 오래 영화를 누리기를 바라십니까? 관직과 영지를 돌려주고, 물러나 꽃과 풀에 물을 주며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숨어 사는 현인을 세상에 나오게 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고아를 보살피며 부모와 형을 공경하고, 공을 세운 자를 추천하며 덕 있는 이를 존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까지 더 많은 영지를 탐내며 진의 정치를 농단하니 백성들의 원한을 사고 있습니다. 진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어찌 진나라가 당신을 제거하는 명분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백리해와 달리 상앙은 법과 엄벌로 사람들을 억지로 따르게 하고 적을 많이 만들었으니, 이제 더 이상 적을 만들지 말고 은퇴해 조용히 사는 것만이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상앙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조량이 말한대로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는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상앙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태자([[진혜문왕|혜문왕]])는 즉위함과 동시에 상앙의 반대파를 규합했다. 이들은 이제껏 상앙의 변법에 반대를 해 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세력이었다[* 진 목공 이후 진나라의 정치는 원로세력과 왕권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점차 그 균형이 무너져 원로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하지만 효공 이후 왕권을 다시 회복하고자 변법을 시행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옛날에 혜문왕 대신 벌을 받은 공자 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원한이 만땅인 상태인지라 상앙을 탄핵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반역자가 되자 일단 위(魏)나라로 망명을 하기로 하고 국경이었던 함곡관을 밤에 몰래 넘으려고 했다.[* 함곡관은 크게 보면 위나라를 동-서로 나누는 중간 지점에 설치되었으니,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위나라 영토를 절반이나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즉 '''해 진 뒤부터 해 뜰 때까지 관문을 여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게 진나라의 법이었기에[* 나중에 혜문왕의 아들이었던 소양왕 시대에 그 유명한 [[제나라]]의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달아날 때도 이런 상황에 놓였는데 그의 식객 중에 [[계명구도|닭 울음소리를 기똥차게 흉내낼 수 있는 자]]가 있었기에 속아 넘어간 수문장들이 문을 열어줘서 달아날 수 있었다. 국경을 지키던 이들은 법을 어긴 셈이었지만 (가짜라곤 해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연 건데 어쩌겠냐는 식으로 그냥 넘어갔다고한다.] 할 수 없이 그 날은 여관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받아줄 수 없으며 어기면 주인이 엄벌을 당한다는 것도 진나라의 법이었기에 그는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법들을 만든 것이 상앙 본인이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의 극치. 결국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어기려고 했으며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자기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된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작법자폐'(作法自斃)다. 상앙은 결국 어찌어찌하여 위나라로 갔지만,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은인이었던 공자 앙을 속이고 감금시킨 뒤 전쟁에서 이겼던 일[* 아무리 공사 없는 전쟁이라지만 은인이었던 적 사령관을 회담이라 속이고 감금한 업보라 볼 수 있겠다.]을 잊지 않았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상앙이 다른 나라로 떠나려고 하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다른 곳으로 고이 보내면 진나라의 보복이 있을까봐 그를 다시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상앙은 할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일단 자신의 영지였던 상 땅으로 가서 군대를 모았는데, 강대한 진나라 군대와 맞설 자신이 없어 일단 약소국이었던 [[정나라]]를 공격해 영토와 인력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지라는 땅에서 혜문왕의 군대가 그의 배후를 쳐 대패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상앙의 시신은 함양으로 보내져 [[거열형]]에 처해진 다음 분해된 조각들이 각 지방에 보내졌고, 연좌제로 삼족이 몰살당했다. [[진혜문왕|혜문왕]]은 상앙의 후원자였던 아버지 진 효공이 죽자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고,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상앙의 변법으로 권력을 잃은 원로 세력들을 포섭할 필요성이 있었다. 즉위 초에 상앙을 제거함으로써 본인과 상앙의 정적인 원로 세력들의 원한을 함께 풀면서 국정을 안정화했다. 그러나 혜문왕은 정작 상앙의 법은 쓸모가 많다면서 폐지하지 않았다. 변법은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예전의 체제로 되돌리려던 원로 세력들의 통수를 치고 반발하는 이들은 제거해버렸다. 혜문왕은 비록 자신이 어렸을 때 변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당했지만,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진나라가 발전하는 것을 보고 존경을 표했던 변법 신봉자였고, 혜문왕이 이같은 뛰어난 재치로 국정을 안정시키면서 상앙의 변법은 유지될 수 있었다. 진나라는 혜문왕 때부터 전국칠웅 최강국으로 등극하면서 혜문왕의 [[현손]]인 [[진시황|진 시황제]]의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생전에 《상군서》라는 책을 집필하여 남겨놓았다. 이는 전국시대 역사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상앙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알 수 있어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선진문헌이 다들 그러듯 상앙 본인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유비]]가 죽을 때 [[유선(삼국지)|유선]]에게 《상군서》를 열심히 읽으라 유언한 것으로 보아 이미 후한-삼국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던 듯하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흔히 유비는 인덕의 아이콘으로 실용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지만 유선에게 남긴 유언에는 상군서와 같이 치국을 위한 여러 서적들을 권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인품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