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앙 (문단 편집) === 부정적인 평가 === 다만 식자들이 단순히 특권층이었고, 법가와 다른 사상인 유가 신봉자라서 상앙을 극딜했다는 것 또한 여러가지 제반 사항을 고려해서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상앙에서부터 시작된 법가적 통치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진 이후, 처음 발생한 가장 큰 반란인 [[진승]]과 오광의 난은 권력자들의 궐기가 아닌 대규모 민란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앙은 물론이고, 그의 정책을 계승한 진 제국의 황제인 시황제, 그리고 그를 곁에서 보좌했던 이사와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인 한비자와 같은 여타 인물들을 혹독하게 극딜했던 [[사마천]]은 극렬 유가 신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살았던 한나라에 무조건 충성하는 인물도, 부유한 권력자하고도 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항우]]와 [[여후]]를 실질적인 통치자로 보고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넣은[* 후한 초기에 편찬된 한서에는 항우본기와 여후본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태사공은 왜 상앙과 그 후예들을 비판했으며, 후대의 정치가인 제갈량은 왜 상앙의 법가적 통치를 무시하지는 아니했으나 한편으로는 상앙과 법가가 가진 한계를 고찰했을까? 일단 법가에서 말하는 '법'과 근대를 거쳐 지금에서 확립된 우리가 알고 있는 '법'의 체계의 사상적 근간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긍정적인 평가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거론하며 은근슬쩍, 상앙을 위시한 법가가 추구한 법의 근간을 만민의 합의에 의거한 법의 정신과 동일시하고 있으나 상앙이나 한비자, 이사 같은 법가에 속한 이론가와 정치가의 법의 근간은 '''군주의 절대 권력 확립''',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을 혹독한 형벌과 적당한 상을 통해 군주가 철저히 통제하는 것'''에 두고 있으며, 법가를 따르는 정치가 중 군주는 이러한 법 체계와 여러 모략 등을 통해 신하와 백성들이 감히 군주의 생각에 반항조차 할 수 없게끔 통제케 하고, 신하는 군주가 제시하는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군주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처세에 초점을 두었다. 물론 이토록 군주의 권위와 권력이 강하고, 신하가 군주의 의중에 유연하게 처신하도록 할 때, 이 군주와 신하가 사회 전반의 발전과 역량 강화, 백성의 삶에 대한 안정을 염두에 둔다면, 강력한 권위와 그에 순응하는 정책 제안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진나라가 거대 제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고작해야 21년이라는 통치기간 끝에 허망하게 붕괴된 것, 그리고 법가적 통치를 통한 강력한 전제 군주를 꿈꾸었던 한무제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법가적 사상의 한계에는 이토록 강력한 권위와 권력을 쥔 군주 스스로가 어떤 인격과 목표를 지녀야 하는지, 그것이 강화된 권력에 의한 통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빠져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또 상앙의 정책이 전국시대와 같은 정복전 체제에서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천하가 평정되어 전쟁이 적어진 이후에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억압하게 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원래 진나라의 법이 엄격해도 전공으로 얻은 작위 반납으로 처벌을 면하는 구조였는데, 이건 달리 해석하자면 까다로운 법과 연좌제로 백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서 그 처벌을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공을 세워야만 하는 착취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규모 전쟁이 사라져서 전공을 챙기지 못하게 되니 백성들(특히 피정복민)은 가혹한 진나라 법의 처벌에 그대로 노출된다. 하여 결국 [[진승 오광의 난|민심 폭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