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편집) == 역사 == 사실상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신도시]]에서 시작했고 그 전에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네바강 하류 [[삼각주]]의 [[늪]]지대였다. 페테르부르크 건설 이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네바강 삼각주 일대는 [[중세]]에 [[잉그리아|이조라]](Ижора)[* [[스웨덴어]]로 잉에르만란드(Ingermanland), [[핀란드어]]로 잉케리(Inkeri)]로 불리던 지역이었으며, 원주민은 [[노브고로드 공국]]에 [[조공]]을 바치던 [[이조라인]][* [[핀란드인]], [[카렐인]]과 친척이다.]이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리보니아 기사단]], [[덴마크]], [[스웨덴]] 등 발트해의 [[패권]]을 노리던 서유럽 국가들이 이조라를 노렸으나, 당시 이 지역에서 종주권을 행사하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수세기에 걸친 이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15세기]] 말 러시아의 패권을 잡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하면서 이조라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후신 [[루스 차르국]]은 [[16세기]] 후반 [[리보니아]] 일대의 패권을 두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등이 엮인 리보니아 전쟁에서 쓴 맛을 보면서 이조라를 잠시 스웨덴에게 양도했으나 [[1595년]] 테우시나 조약으로 돌려받았다. 하지만 스웨덴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육로 연결을 위해 이조라를 계속해서 노렸다. [[17세기]] 초 [[혼란 시대]]로 인해 [[루스 차르국]]이 만신창이가 되자 기회를 살린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617년]] [[미하일 1세|미하일 로마노프]]와 스톨보바 조약을 체결하여 이조라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을 [[루터교]]화시키려던 스웨덴은 개종시 [[세금]] 감면 및 [[병역 면제]] 등을 제시하고 자국 영토 내 루터교를 믿는 [[에스토니아인]]과 [[핀란드인]]을 이조라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대북방전쟁]] 직전인 [[1695년]]에 이르면 이조라의 루터교회 신자는 잉그리아 인구의 74%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대기후]]와 [[늪]]지대 투성이인 척박한 땅이었기에 인구는 겨우 2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발트해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인 이조라를 상실한 [[루스 차르국]]은 이후 이조라의 탈환을 목표로 하였다. 마침내 [[대북방전쟁]] 때 이 지역을 점령한 [[차르]] [[표트르 1세]]가 [[서구화]]정책의 일환으로 [[서유럽]]과 통하는 창구인 이조라 지방으로의 [[천도]]를 결정, 네바강 기슭의 스웨덴 [[성형 요새]]인 뉘엔스칸스(Nyenskans)[*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작인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 [[스몰니 수도원]] 건너편에 있었다.] 근처 삼각주 늪지대를 매립해 [[1703년]] [[5월 27일]]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말은 간단하지만, 근대적 토목기술이 없던 당시에 삼각주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세우려는 것은 미친짓이었고,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저 매립 작업에 희생되었다. 일명 '뼈 위에 세워진 도시'. 다만 이 설은 현대까지도 논란이 있는데 이전 역사가들이나 당대인들의 증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공식 기록이나 구체적인 수치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단편적인 공식 수치는 존재하나 수십만이 죽었다는 것은 아니다) 소련 시대에 고고학 탐사가 이루어졌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진 못했다. 사실 정말 뼈 위에 세운 도시라면 도시 밑의 땅을 팠을때, 뼈가 나오는 것으로 간단히 입증가능하다. 전근대의 대규모 공사이니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긴 하겠지만 반대로 전근대의 평균치를 넘어서는 수준이라던가 정말 문자 그대로 '뼈 위에 세워진 도시'는 아니었다는 소리. 그런데 이러한 명확한 증거도 없으니 사실상 근거없는 풍문이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정말 수십만을 동원했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애시당초 그만한 동원력을 발휘할 수 있는 러시아가 스웨덴이고 오스만이고 모조리 정복하지 못했냐는 딜레마가 생긴다. 9년 간의 작업 끝에 도시의 건설이 어느 정도 완료된 [[1712년]] [[표트르 1세]]는 정식으로 이 도시로 천도한 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 이름지었다. '베드로'의 다른 표기가 [[피터]](영어)·[[페터]](독일어)·[[표트르]](러시아어)인 걸 생각해 보면, 사실상 이 새로운 수도에 표트르 1세 본인의 이름을 갖다붙인 셈이다.[* 서구문명에서는 흔한 사례인데,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건설한 피람세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알렉산드리아]], [[프랑수아 1세]]가 재설계한 [[프랑스]] 최대의 항구도시 가운데 하나인 [[르아브르|프란시스코폴리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스탈린그라드]] 등. 다만 이들 도시 중에서 그 이름이 후대까지 유지된 경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리아]] 등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황제들은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귀족]] 문화 옹호자였던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는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모인 귀족들과 장사하러 온 [[독일인]]과 [[네덜란드인]], 귀족들의 [[프랑스어]] 교사로 온 [[프랑스인]], 스웨덴 점령 시절 정착했던 [[잉그리아 핀인]] 등이 모이며 [[국제도시]]로 변모하였다. 참고로 도시의 이름은 [[스웨덴어]] 상트(sankt)[* 핀란드의 [[미켈리(핀란드)|미켈리]](Mikkeli)를 스웨덴어로 상트미셸(S:t Michel, 본래 형태는 Sankt Michel), [[카리나(핀란드)|카리나]](Kaarina)를 상트카린스(S:t Karins)라 부르는 데에서 스웨덴어를 차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표트르 대제가 [[대북방전쟁]]을 치렀을 당시 스웨덴은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더불어 [[스웨덴 제국|유럽의 군사 강국]]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국가였던 스웨덴은 표트르 대제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군제 개혁을 할때 스웨덴의 군사 전술을 카피해서 [[폴타바 전투]]에서 그대로 [[스웨덴군]]에게 사용했다.]와 [[독일어]] 페터스부르크(Petersburg)가 합쳐진 조어이다. 러시아어로 이름을 짓는다면 스뱌토페트로그라드(Свято‑Петроград)[* 러시아어 인명 [[표트르]](Пётр / Pjótr)는 다른 격 형태에서는 강세가 뒷 음절로 옮겨가기 때문에 페트르-(Петр-)의 꼴로 바뀌게 된다. 대표적으로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 / Petrográd)나 [[페트로프]](Петро́в / Petróv) 같은 표현이 있다.]로 쓸 수도 있는데, 수도의 이름을 자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붙였다는 점에서 표트르 대제가 얼마나 서유럽을 동경했고, 러시아를 이와 같이 개혁하고 싶어했는 지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비유하면 [[조선]]의 [[국왕]]이 [[중국]]을 본받기 위해 수도 '한성'을 한국식 [[한자어]] 발음이 아닌 [[중국어]] 발음인 '한청'을 그대로 쓰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비유로 한자문화권에서는 한자식 표기를 차용하지 발음까지 따라하는 경우는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제국]]에 대한 반감으로 독일어식 명칭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베드로]]의 도시')로 개칭되었다.[* -burg([[부르크]])로 끝나는 지명은 [[독일어권]]에서 많이 붙이는 이름 중 하나이다. 이름 뿐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식 건물이 많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만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격동의 사건 또한 여러 차례 일어났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 [[군주제]]를 무너트리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알린 [[러시아 혁명]]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시작된 곳 또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하지만 [[핀란드]]가 독립하면서 국경이 바로 코앞에 생겼고,[* 핀란드-소련의 국경도시 테리요키(Terijoki,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 일부인 젤레노고르스크)와 페테르부르크는 불과 50km도 안 되는 거리였다. 서울-판문점 거리와 비슷하다. 2차 대전 후 핀란드의 일부 영토가 소련에 할양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의 국경선은 150km로 멀어졌다.] [[러시아 내전]] 당시 발트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외국 [[함대]]의 수도 공략을 우려한 소비에트 당국이 [[1918년]] 수도를 [[모스크바]]로 다시 옮기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1924년]] [[소련]]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페트로그라드는 그의 이름을 따 레닌그라드('레닌의 도시')로 개칭되었다.[* 레닌의 후계자인 [[스탈린]]의 이름을 본딴 [[스탈린그라드]]도 있었으나 [[1953년]] 스탈린이 죽고 그의 지위까지 격하되면서 일찍이 소련 시절인 [[1961년]] 지금의 [[볼고그라드]]로 지명이 바뀌었다.] 수도의 지위를 잃었지만 레닌그라드는 제2의 도시로서 소련 제2의 도시로 기능하였다. [[독소전쟁]] 당시에는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주요목표[* 개전 직전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짜던 중 2개의 주요목표 중 하나로 [[키이우|키예프]]를 우선시 할 것인지 [[모스크바]]를 우선시 할 것인지에 대해 독일군 사령부는 갈등이 심했으나 레닌그라드 만큼은 모든 참모진이 동일했다.]로 [[독일군]]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핀란드군과 협공하여 [[레닌그라드 포위전|레닌그라드를 900일 가까이 포위하였다.]] [[나치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도시의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아돌프]]의 도시'라는 뜻의 '아돌프스부르크(Adolfsburg)'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레닌그라드는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끝내 그 이름을 지켜냈다. 독소전쟁 당시의 영웅적인 사투를 인정받아 레닌그라드는 [[1945년]] 종전 직후 [[영웅 도시]]로 지정된 최초 4개의 도시[* 나머지 3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 [[세바스토폴 공방전|세바스토폴]], [[오데사]].]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에서는 이 도시를 기려 레닌그라드 수방메달[* 2차 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만든 메달.]과 [[레닌그라드 250주년기념메달]]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레닌그라드가 치른 희생은 너무나 커서 수만 동에 달하는 유서깊은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3백만 명에 달하던 도시 인구는 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전쟁]]을 피해 도시를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오고 이후 소련 인구가 크게 늘고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소련 해체]] 직전에는 인구가 50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수립되면서 원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때, 이름을 아예 러시아어식 이름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원래 뜻을 살려 '스뱌토페트로그라드'로 바꾸자는 의견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바 강에서 이름을 따 '네보그라드'로 바꾸자는 의견이 꽤나 힘을 얻었던 모양. 하지만 결국 옛 명칭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결정되었다.] 다만 소련의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는 중년 세대에게는 아직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듯하다. [[박노자]]의 고향도 이곳인데, 그도 이곳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지 아니면 의식적으로인지 그렇게 부른다. 사실 [[세대]]를 막론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레닌그라드가 별개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0세기]] 초에 태어나 소련 해체 시점까지 살았던 노인들은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태어나 페트로그라드에서 자랐고, 죽을 때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살 줄 알았는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눈을 감게 되었다"라는 [[농담]]을 즐겼다. [[1914년]] [[6월]] 이전에 태어나 [[1991년]] [[12월]] 이후에 임종했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를 거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종하게 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 포위전|두 차례의]] [[소련 해체|격변기]]를 거치며 인구가 급감한 바 있고, 러시아의 [[평균 수명]] 상승이 오랜 기간 지체되었기 때문에 저 테크를 실제로 이룬 [[사람]]은 많지 않다.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싸고 있는 행정구역인 [[레닌그라드 주]]에 아직 남아 있다.[* 비슷한 사례로 우랄 산맥의 도시 [[스베르들롭스크]]도 소련 붕괴 후 원래 이름인 '[[예카테린부르크]]'로 돌아갔지만, 예카테린부르크가 속한 주의 이름은 소련 시대 이름인 [[스베르들롭스크 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카테린부르크와는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는 레닌그라드 주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행정구역이다.] 모스크바에도 이곳으로 오는 [[열차]]가 발착하는 역의 이름은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레닌그라드 역이다. [[풀코보 국제공항]]의 [[IATA]] 코드도 ULLI로, 레닌그라드 시절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풀코보 공항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레닌그라드 시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