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새정치국민회의 (문단 편집) === 김대중 대통령 당선 - [[여당]] '국민회의' === 그렇게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40.3%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였고,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면서 [[여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동의함으로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국민회의로서는 전노 사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21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1&officeId=00020&pageNo=7&printNo=23744&publishType=00010|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983660_30717.html|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국민들도 이해·용서할 것]]][*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2300209105004&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3&officeId=00020&pageNo=5&printNo=23746&publishType=00010| 동아일보 1997.12.23]]] 김영삼 대통령 본인이 사면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집권 반년만에 치러진 선거로, 여당이 지방선거에 승리한 첫 사례이자, DJP연합의 위력과시였다. 국민회의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두 곳과 호남, 제주를 비롯한 6곳에서 승리하였고, 자민련 역시 충청과 인천 4곳에서 승리하여 16개 광역단체 중 10개를 압승했다. 한나라당 역시 영남과 강원 6곳에서 승리했지만, 내용 면에서 서쪽 지역 전역을 석권한 국민회의가 압승이었다. 이 시기가 국민회의의 전성기였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 이후 안정적인 국정운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계개편을 추진하였다.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을 영입하고 [[이인제]], [[이만섭]]의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과 합당하는 방식을 통해 여대야소를 만들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개혁정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영남권(TK, PK)에서도 의석을 내는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한다는 차원에서 [[2000년]] 1월 20일, 새로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에 합당되는 형식(흡수합당)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또다시 실패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